스피노자와 홉스에 있어서의 국가의 탄생
인간은 이성의 지도를 받는 한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치한다.(236p) 더욱이 이성의 지도에 따르는 삶은 곧 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일컫는데(238p), 덕을 따르는 사람들의 최고의 선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238p) 神을 인식하므로 인간은 이성에 의해 필연적인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한다면 각자는 다른 사람을 전혀 해치지 않고 자기의 권리를 누렸을 것이다.(242p) 그러나 인간은 정서에 예속되어 있으며(216p) 이 정서는 인간의 능력이나 덕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216p) 인간은 서로 대립적으로 된다.(235p) 이러한 대립의 상황에서 인간은 타인에게 해가 되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겠다고 보증하는 일이 필요하다.(242p) 그것이 곧 국가의 탄생이다. 국가는 공통적 생활양식을 규정하며 법을 제정하는 실권을 갖는다.(243p) 이 법은 이성이 아닌 형벌의 위협에 근거한다.(243p) 그에 따라 인간은 자연상태의 자유로움을 잃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의 강제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체험한다. 받아들임 즉 복종은 공적이고 불복종은 죄이다.(243p) 이에 근거하여 공동의 동의에 의해 자연상태에는 없었던 정의와 불의가 생겨난다.(243p)
홉스(T. Hobbes)의 사회계약설(social contract)과 비슷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자연상태(state of Nature) 및 ‘보증하는 일’ 등의 계약관념, 국가에 관한 자유(freedom)와의 대립적 인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홉스의 사회계약설이 구조적 유사성을 갖는다하여 실질적으로도 유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연상태에 대한 묘사 및 이성개념(reason)의 차이, 더욱이 국가의 탄생으로 귀결된 인간에 관한 인식 등이 전혀 다르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against for all)으로 보았다. 이러한 투쟁 상태는 홉스가 바라본 인간관의 당연한 결과이다. 무연고적(unencumbered 개인 및 추상적(abstract) 개인은 욕망의 극대성과 자원의 희소성(scarcity)으로 말미암아 인간 사이의 투쟁적 상황을 낳는다. 특히 홉스가 주의했던 감정은 ‘공포(fear)’이다. 투쟁 상태에서의 인간은 ‘폭력에 의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극대화된 공포(fear for death)를 느끼게 되고 이러한 공포의 정념에 근거하여 인간은 국가를 만들게 된다. 여기서 작용하는 계산능력(calculation capacity)으로서의 이성은 자연권(natural rights)의 일부를 '국가(Leviathan)'에 넘기는 계약(contract)을 가능하게 한다. 계산능력으로서의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법을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능력이다. 이성에 의해 알게 된 자연법에 의해 국가를 건설한 인간은 자연상태의 무질서를 막아준 국가에 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갖는다. 이것은 훗날 로크(J. Locke)의 비판을 받고 그가 제시한 제한정부론의 등장배경으로 설명된다. 어찌되었든 홉스는 국가와 자유의 대립관계에 관해 인식을 분명히 하였지만, 자연상태의 무질서를 완화시켰다는 측면에서 자유의 손실은 어느 정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 같은 홉스의 국가관은 이상(idea)에 관한 합의가 아닌 안전확보라는 현실적인 자연인의 심리를 반영한 정치이론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자연법을 인식하는 이성의 능력을 계산능력이 아닌 神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한다. 자연법 역시 홉스가 정의한 그것과는 다른 내용을 가진다. 따라서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홉스가 상정한 비극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감정에의 예속은 홉스의 자연상태를 유발한다. 여기서 홉스는 투쟁적인 자연상태를 당연한 모습으로 보았지만 스피노자는 감정에의 예속상태 즉 탈이 난 인간들이 만든 상태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자연상태는 이성의 바른 명령을 준수함으로써 神에 관한 인식을 올바로 하고 필연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나 탈이 난 인간들은 그러한 해결책을 외면하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보증’이란 방법으로 해결하게 된다. 따라서 국가는 스피노자가 보기에 진정한 자유와는 상치되는 거대 권력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재를 인식할 수 없는 인간은 국가에 의해 등장한 죄, 공적, 정의, 불의 등의 개념에 의해 더더욱 감정의 예속상태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스피노자는 최상의 국가로 ‘神政國家’를 설정하게 되고, 신정국가의 핵심적 목표를 자유의 증진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홉스의 최고 정치적 선(Pol. good)은 안전ㆍ전쟁회피ㆍ질서 확립이지만 스피노자의 최고 정치적 선은 인간의 자유증진이다. 더욱이 스피노자의 자유개념은 흔히들 알고 있는 이사야벌린(I. berlin)의 소극적 자유관념류가 아닌 神에 관한 올바른 인식에 근거한 자기원인의 필연적 자유이다. 자연상태 후 사회계약이라는 동일한 국가탄생의 구조 이면에는 이렇듯 상이한 내용이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홉스의 사회계약설을 그대로 수용했다’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수업시간 내내 이 문제에 관한 의문이 떠나질 않았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자기원인과 홉스의 염세적인 본성인식은 전혀 조화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에티카』4장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 같은 내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위의 내용은 정치학과에서 공부한 홉스의 이론과 수업시간에 들은 스피노자의 이론에 근거하여 비교 관점에서 써본 글이다. 이러한 내 관점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판명 나겠지만 적어도 스피노자의 국가관과 홉스의 국가관이 같지 않다는 것에는 강한 확신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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