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택의 논리
마음에서 몸으로의 방향성을 취하는 연역(deduction)의 중세적 방법은 성직자들의 타락 및 인간성의 왜곡 등에 의해 중세적 탄압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탄압에 항거하여 르네상스(Renaissance), 종교개혁(Reformation) 등의 근대적 운동이 전개되고 연역과 귀납(induction)의 분리를 통한 귀납의 방법론만이 근대적 방법론으로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뉴턴(I. Newton)의 고전역학은 과학적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을 통하여 기계론적ㆍ원자론적 세계관으로써 자연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한다. 따라서 물질의 속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원자 간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분석(resolution)과 종합(composition)의 방법론은 사회과학에서도 차용되어 사회의 속성을 알기 위해 개인의 속성(human-nature)을 분석하고 개인들의 관계를 구성(social contract)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론적 개인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는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ㆍ심화에 큰 영향을 끼친다. 더욱이 방법론적 개인주의로써 파악한 개인의 속성은 각 개인들의 개체보존(self-preservation)을 위해서 사익(self-interest)추구를 합리화하는 성질을 가진다. 고대ㆍ중세시기에 있어 이성에 의해 조절되어야할 개인의 욕망은 이제 아무런 장애 없이 수용되고 추구되었다. 더 이상 이기적 행위를 도덕적 타락의 범주로 보지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권리(Right)로써 보장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근대의 움직임은 神에 의해 억눌려 있던 인간을 해방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이에 칸트(I.Kant)는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써 중세의 억압이 다시금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는 중세의 타락이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형이상(meta-physics) (엄밀한 의미로서 형이상은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마음, 神, 하늘의 영역과는 차이가 있다. 더욱이 神 역시도 인격적ㆍ주제적 개념의 神 개념이 아님을 명백히 하고 싶다. 그러나 이해를 싶게 하기 위해서 ‘형이상’이란 단어를 사용해도 큰 무리 없이 의미가 전달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의 앎에 관한 불평등이라 파악하여, 이데아를 알 수 없는(不可知) 영역으로 명명한 다음 ‘알 수 있는 것만 말하자’라는 논의를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분리작업인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영역은 감각, 경험, 인과율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며, 神ㆍ마음(心)ㆍ天 등의 내용은 불가지의 영역으로 학문의 대상이 아닌 종교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를 한 후 이라크 침공을 결정한 부시의 행위는 과연 정당화될 수 있고 그 자체가 바람직한 행위일까? 이 같은 모순적 행동에 있어 뉘우침의 결여는 부시 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정치와 도덕이 분리된 근대사회의 문제인가?
칸트가 세운 이러한 울타리는 칸트에 의하면 판단이성으로써 양 영역 간 전환이 가능하다. 그러나 판단이성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아 니체(F.W. Nietzsche)와 헤겔(G.W.F.Hegel)은 ‘힘’(power)으로 해석하였다. 이후 등장한 역사적 진화론과 우생학은 강한 것에 관한 왜곡된 동경과 힘의 논리에 기인한 사상들이다. 더욱이 도덕은 사실과의 관계에 있어 마키아벨리(N.Machiavelli) 이래로 '사실(fact)과 가치(value)ㆍ당위(ought to)의 분리'라는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도덕이 가치ㆍ당위로 밖에 판단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내용이지만, 어찌되었든 도덕이 가치와 당위인 이상 사실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현실을 배제한 유토피아(Utopia) 옹호라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더욱이 경험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정치의 제 영역은 도덕과는 거리가 먼 힘의 요소가 중시되는 경향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정치의 역동성을 중요시하는 포스트모던(Post-Modern)의 움직임 역시 형이상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형이상을 긍정하는 자체적인 모순으로부터 포스트모던 역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음과 몸의 분리라는 칸트의 울타리 작업을 통하여 인류는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현실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의도가 어찌되었든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현실은 칸트가 생각해도 바람직한 현실이 아닌지라 그는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은 누구나가 존엄하고 잠재적으로 평등하다는 제1명령으로서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인 것이다. 이러한 정언명령으로부터의 입헌주의적 법치국가 개념의 도출은 각 개인이 조화롭게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와 강제를 구성함으로써 힘의 논리에 의한 갈등적 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기제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언명령은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을 외면한 형식주의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형이상을 배제하고 형이하만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정언명령은 억지스러운 감이 있는 것이다. 칸트 역시 울타리를 세웠지만 스스로가 울타리를 부분적으로 허무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 살핀 근대사상의 등장과 한계는 선택의 논리에 기인한 것이다. 근대사상의 등장은 중세사상의 선택의 논리 때문이었다. 중세는 형이하가 아닌 형이상만을 선택하여 형이하의 측면을 배제하는 모순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근대의 등장은 이러한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형이하의 중시라는 대책을 마련한다. 그러나 근대 역시도 형이하의 중시에만 그치는 실수를 범함으로써 새로운 폐해를 양산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 모두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하고 다른 쪽은 외면한 선택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본래 하나가 아닌 둘인데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하나만을 선택하고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라 강요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2. 수순의 논리
수순의 논리는 선택의 논리의 폐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이는 양자의 동시성을 확보하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시성은 잘못된 수순에 의해 선택의 논리로 전환되는 폐해를 낳을 수도 있다. 즉 어떠한 수순인가에 따라 동시성의 확보가 아닌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대성의 수순은 본래 형이하에서 형이상으로의 수순 즉 귀납의 수순이었다. 그러나 칸트 이후 이러한 수순은 울타리를 표명함으로써 선택의 논리로 전환되었다. 형이하로써 형이상을 파악하는 어려움은 먼저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것부터 시작한다. 유명한 러셀(B.Russell)의 역설은 형이하의 시각으로 본 형이상의 어려움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그 역시도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를 ‘형태(type)’로 구분함으로써 있는 것만 생각하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올바른 수순이 전제되지 않는 한 형이하의 모순은 해결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올바른 수순의 전제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형이상에 관한 인식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이라 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영적 존재, 귀신 등의 무술적 요소를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나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마음의 영역을 인정하고 마음과 몸의 울타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마음에서 몸에 이르는 수순의 논리를 성립해야 한다. 몸에서 마음에 이르는 수순의 논리는 선택의 논리로 전환됨을 우리는 근대의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물론 중세 역시 마음에서 몸에 이르는 수순이었지만 그것의 타락된 형태를 감안한다면, 수순의 논리가 단순한 중세로의 회귀와는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의 논리 하에서 사실과 가치ㆍ당위의 문제는 영원한 대립적 요소로 작용한다. 그에 따라 우리는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자체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사실과 가치ㆍ당위의 일치라는 해결방법을 제시하여 선택의 논리를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과 가치ㆍ당위의 일치는 형이하만을 중시하는 세계에선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세계에서 가치와 당위는 알 수 없는 영역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영역은 학문이 아닌 종교의 영역으로서 개인 스스로의 믿음의 영역으로 배제된 상태이다. 가치ㆍ당위를 주장하는 자는 이상주의자로서 현실의 영역인 정치권에서 철저하게 배제 당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정치와 진리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걷게 된다. 진리는 정치세계에서 하나의 의견으로 간주될 뿐이다. 보편적 진리가 있다면 타협ㆍ토론ㆍ합의는 불필요한 과정으로서 정치의 세계에선 그러한 과정을 생략한 오로지 진리 적용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진리와 정치의 긴장 관계적 시각으로 예수의 죽음, 소크라테스의 죽음, 공자의 주유천하를 바라본다면 우리가 놓치는 중요한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 어찌 보면 그러한 성인의 죽음과 고난이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
정치와 진리뿐만 아니라 정치와 도덕의 관계 역시 왜곡된 해석만이 양산될 뿐이다. 도덕을 가치ㆍ당위로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마땅히~해야 한다’는 내 능력을 벗어난 억압적 요구를 요하게 된다. 보편주의의 파쇼화는 억압적 결과를 증대시킴으로써 인간의 생명권도 파괴 할 수 있는 무서운 위험성을 지닌다. 혹은 마땅히~해야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내ㆍ외부적인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또한 정치를 바라봄에 있어서도 도덕의 가치ㆍ당위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정치의 불확실성과 무예측성, 가변성을 외면하게 되고 정치를 의도적으로 새롭게 틀 지으려 하는 일면적인 시각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다. 더욱이 현대의 다원주의(Pluralism)사회에 있어 이러한 정치의 역동성 조명의 한계는 정치질서를 소박하게 보는 신중주의적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신중주의는 신중성(prudence) 즉 공동의 惡(vice) 회피에 집중함으로써 실용적인 삶을 영위하자는 입장이다. 공동의 이상(idea)에 관한 합의가 어렵기 때문에 공동의 惡 회피에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주의적 시각은 보편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을 ‘공동의 惡 회피’라는 경험적인 요소로부터 도출한다는 것에 모순이 있다. 공동의 惡은 경험적ㆍ가변적인 것으로서 그 사회의 건전성이 증명되지 않는 이상 그 사회 공동의 惡이 진정한 善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공동의 惡을 합의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가치와 당위의 영역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와 같이 앞의 논의들은 정치와 도덕의 관계를 사실과 가치ㆍ당위의 관계로 보는 시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한 시각을 갖는 한 양자 간의 일치와 분리는 끊임없는 비생산적 논쟁을 양산할 뿐이다. ‘일치하자니 현실적 정치의 영역을 도덕으로써 억압하여 사실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분리하자니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와 정치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과연 정치와 도덕은 사실과 가치ㆍ당위의 관계로만 해석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여기서 수순의 논리는 어떠한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3. 퇴계의『성학십도』 이광호 교수가 번역하고 홍익출판사에서 출간(2004) 한『성학십도』를 참고하였다.
(이후로『성학십도』를 인용함에 페이지만 기입할 것임.)
와 수순의 논리
퇴계의『성학십도』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성학십도』를 주자학적 성학론의 표출 및 수양서로서 평가하고 있다.『태동고전연구 제4집』「이퇴계의 ‘성학십도’ 연구」이광호. 1988
『유교사상연구 제20집』「유교의 종교적 성격과 오늘날 종교적 수행에의 응용방안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의 경우」이동희. 2004
『남명학연구 제16집』「퇴계의 『성학십도』:주자학의 이념과 성학의 설계도」한형조. 2003
『한국철학논집 제16집』「퇴계 이황의 문화관:『성학십도(聖學十圖)』를 중심으로」조춘염. 지준호 역. 2005
『퇴게학 제7집』「이황의 수양론 - 성학십도와 경을 중심으로」이해영. 1995
『대동문화연구 제24집』「퇴계의 성학에 관한 고찰 ≪성학십도≫를 중심으로」오석원. 1990
그러나 본인은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을 견지하고자 한다. 즉 퇴계가 주자학을 받아들여 주자학을 심화ㆍ발전시켰다는 시각과 달리, 선조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함에 있어 주자학을 차용했다는 시각으로써 바라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성학십도』에 제시된 ‘태극도설’, ‘서명’ 등의 중국 문헌에 관한 연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퇴계 사상의 독자성을 파악함에 있어 중국사상가들이 했던 말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태극도설’, ‘서명’ 등의 글을 어떻게 퇴계가 바라보고 해석했는가가 더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각각의 그림에 관한 해설을 생략하고『성학십도』에 나타난 ‘독자적인’ 퇴계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앞서 제기한 정치와 도덕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퇴계는『성학십도』서문에서 修身과 安人의 동시성을 聖學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15~18p
성학을 행하는 방법으로 퇴계는『논어』「위정」에 나온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를 인용하며 공자와는 다른 Philip.J.Ivanhoe는『Confucian Moral Self Cultivation』에서 공자의 수양모델을 '획득(acquisition)'의 學으로 설명한다.
思와 學의 수양론을 제시한다. 22p
그러나 퇴계는 ‘개인이 소중한 줄 아는 사람이 국가도 소중한 줄 안다’는 思에서 學으로의 수순의 논리를 주장한다. 25~27p
이러한 수순은 修身과 安人의 관계에도 적용되어, 퇴계는 修身을 통하여 安人에 이르는 동시성을 추구한다. 퇴계가 생각하는 修身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이다. 더욱이 ‘왕조’라는 정체의 특성상 임금의 수신은 조선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민감한 문제인 것이다. ‘어떠한 왕인가’에 관한 질문은 전체 사회를 좌지우지 할 만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주자학적 지식인의 통치사회인 조선을 왕 한 사람의 정치 영향력만으로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긴 하다. 그러나 ‘왕조’사회에서 왕의 修身 정도 및 여부는 왕조 사회에 있어 어떠한 다른 방법보다 바람직한 통치를 위한 가장 효율성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비유컨대 왕조사회의 바람직한 통치자의 덕성은 민주사회에 있어서의 시민의 덕목(virtue)과 중요성 면에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학은 조선왕조 사회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엘리트 중심주의적 시각으로만 퇴계의 성학을 바라본다면 퇴계의 성학을 올바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십도 중 제1도로써 퇴계는 ‘태극도설’을 싣는다. ‘태극도설’을 싣는 이유로 그는 ‘여기서부터 단서를 찾아 ’소학·대학‘과 같은 종류에 힘씀으로써 一源에까지 소급하여 올라가게 됨’ 37p
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시작의 근원을 추구하고 끝을 반성하는(原始反終)’ 수순의 논리로써 無極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한 퇴계의 독특한 사상(形旣生矣 神發知矣)을 반영한다. 만약 無極을 알 수 없는 無形의 이치라 파악한다면 無極은 知覺 33p
으로 인식 불가능하다. 그 순간 無極과 太極은 분리되어 인간은 어떠한 노력을 한다하더라도 一源에 미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無極而太極’은 만물의 근원인 太極의 속성으로 無形의 無極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만물 자체인 太極을 구성함에 있어 근본이 되는 無極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無極은 無形이 아닌 생각·정신으로서의 있음·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계인 모든 太極의 근원에는 無極이 존재한다.
제2도인 ‘서명도’에서 퇴계는 수순의 논리의 중심에 서 있는 ‘나’를 강조한다. 41~42p
그럼으로써 퇴계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선택의 논리에 대한 경계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통이면서 만수이니 비록 천하를 한 집안으로 하고 중국을 한 사람으로 생각해도 겸애의 폐단으로 흐르지 않는 것이요, 만수이면서 일관이니 비록 친소의 정이 다르고 귀천의 등급이 다르더라도 나만 위하는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는다.
선택의 논리에 따른 폐해는 내가 중심이 되지 않고 나만을 위하거나 혹은 남을 자기로 여기는 병통 50p
, 그리고 나와 학문의 무관성에 기인한 것이다. 즉 배우고 아는 행위의 중심인 ‘내’가 배우지 않은 것·알지 못하는 것을 무시하고 나만을 위한 사사로움(不仁)과 남과의 획일성(同)에 집중한다면, 다름 아닌 ‘나’자신이 피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不知의 영역으로 매도하여 배우고 아는 노력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太極의 체계가 고장 났다면 우리는 과감히 無極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無極을 배제하고 太極의 범위 내에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나’ 자신은 선택의 폐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퇴계는 ‘소학’과 ‘대학’은 서로 기대어 이루어진 것이므로 하나이면서 둘, 둘이면서 하나라 하였다. 57p
그 이유는 ‘소학’에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배우고 본원을 함양할 수 있음으로써 56p
‘대학’에서 ‘격물→치지→성의’의 선후 구조를 지키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몸을 닦을 수 있게 되는 올바른 수순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64p
이러한 과정에 있어 敬은 上과 下에 다 통하는 것 65p
으로서 모든 것에 있어 ‘나’는 敬을 떠날 수 없다. 퇴계는 ‘태극도설’이 아닌 ‘대학도’에서 敬을 의도적으로 제시했음을 밝히고 있다. 65p : 그 이유는 본인이 보기에 본원의 설명 즉 수순의 논리를 설명하는 ‘태극도설’이 아닌, 수순의 논리를 실천하는 ‘대학도’에서 敬을 등장시킴으로써 敬에 관한 호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란 추측을 해본다. 또한 敬은 수순을 전체적으로 총괄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수순의 전체적 구도가 드러난 ‘대학도’에서 등장하는 것이 논리에도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백록동규도’ 역시 오륜을 바탕으로 하여 심법의 핵심을 얻으려고 한다는 점 71p
에서 ‘소학도’, ‘대학도’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로써 퇴계는 이상의 다섯 그림이 뿌리를 天道에 두고 있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에 있어 삶의 힘을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시했음을 밝힌다. 71p
‘심통성정도’에서 퇴계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性을 기르고 情을 감싼다면 학문의 이상을 얻게 될 것’ 76p
이라는 수순의 논리를 주장한다. 퇴계보다 앞선 중국의 사상가들이 性과 情을 무엇이라 정의했던 간에 퇴계는 마음이 性과 情의 어울림과 묶음을 주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77~79p
따라서 마음이 性과 情의 통섭에 실패하게 되면 性과 情은 ‘나’를 벗어나 ‘나’의 주재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76p
그러므로 마음으로부터 시작한 수순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에서 마음은 ‘관리 능력’의 개념으로 대두된다. 후에 자세히 논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퇴계는 중국의 사상가들이 놓친 이러한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중도ㆍ하도를 추가한다. 중도와 하도에서 퇴계는 程子의 동시성(論性不論氣 不備 論氣不性 不明 二之則不是)에 반대하며 ‘나’를 갖추는 敬으로써 수순의 논리를 주장한다. 理가 발하면(마음으로부터 출발한 수순의 논리) 氣는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나(理發氣隨) 氣가 발하면(몸으로부터 출발한 수순의 논리) 理는 탈수도 안 탈수도 있다.(氣發理乘) 理가 타지 못하는 상황은 곧 선택의 폐해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선택의 논리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써 퇴계는 ‘심법을 밖에서 구할 필요 없이 자신 안에서 얻을 수 있음을 강조’ 80p
하며 수순의 주체가 되는 ‘나’의 敬을 강조한다. 이러한 구조적 틀은 ‘인설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퇴계는 ‘심학도’에서 율곡과 다른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 心과 敬의 관계에서의 다양한 수행 덕목을 율곡은 절차성으로 보았고, 퇴계는 전체적인 관점으로써 동시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93p
퇴계는 동시적으로 추구해도 순식간에 잘못될 수 있는 예를 안연을 통해 들면서 율곡과 다른 敬에 관한 관점을 견지한다. 이러한 敬의 동시적 수양론은 ‘경재잠도’에서 처한 상황 즉 일상성의 소중함으로 연결된다. 101p
언제 어디서나(時分, 地頭) 마음의 눈으로 깨닫고 살핌으로써 102p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성학의 특성을 강조한다. 비로소 성학은 왕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필수불가결한 성인의 요건으로서 보통사람도 가능한 수양론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학의 시작과 끝은 敬으로 귀결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02p
마음의 주재력과 性ㆍ情으로 대표되는 만물의 어울림은 敬을 통한 수순의 논리로써 가능한 것이며, 이러한 제반 과정은 일상생활에서 누구나가 할 수 있다. 누구나가 할 수 있다는 ‘나’의 중요성 강조는 ‘숙흥야매잠도’에 이르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敬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된다.
대저 道는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유행하여 어디를 가더라도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가 없는 것이 없으니 어느 곳에선들 공부를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또 잠깐 사이도 정지하지 않으므로 순식간도 이가 없는 때가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07p
어느 곳 어느 때에나 존양하고 성찰하여 번갈아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나 털끝만큼의 잘못도 없을 것이요 어느 시간적 상황에서나 잠시의 중단도 없을 것입니다. 108P
후의 다섯 그림이 심성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힘써 경외하는 마음을 높이는 즉 崇敬畏로『성학십도』를 마무리 지음은 퇴계의 사상이 敬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게 한다.
4. 퇴계의 정치사상과 정치ㆍ도덕의 관계
-『무진육조소』 민족문화추진회가 1968년에 발간한『국역 퇴계집Ⅰ』을 참고하였다.
(이후로『무진육조소』를 인용함에 페이지만 기입할 것임.)
를 중심으로
퇴계의『무진육조소』는 그가 68세가 되던 때인 어린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지 겨우 두 해가 되는 무진년(1568)에 올린 時務封疏이다.『퇴계학보 제94집』「무진육조소에 나타난 퇴계의 성학이념과 정치적 사유」정병석.
6개의 時務封疏는『성학십도』의 성학이념을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한 것으로써 퇴계의 정치사상을 알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자료이다.『성학십도』가『무진육조소』이후에 쓰여진 퇴계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이러한 구조를 취하는 이유는 퇴계의 사상이 일관성을 띄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원리를 말한『성학십도』를 먼저 살펴봄으로써『성학십도』에서 강조된 퇴계의 사상이 구체적인 현실에 있어 어떻게 적용되는가의 문제를 살피는데 보다 유용하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퇴계가『성학십도』에서 강조한 治本으로서의 修身은『무진육조소』의 3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敦聖學以立治本) 퇴계는 심법의 요체로서 精一執中을 주장한다. 106P
精一執中을 통한 개인의 도덕 수양은 바람직한 정치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바람직한 사회구성으로 발전한다. 물론 이러한 논리에 있어 개인의 도덕 수양은 제왕과 보통사람의 구별이 없다. 109p
3조에서도 퇴계는 수순의 논리를 강조하는바, 修身의 조목으로써 마음과 뜻을 중히 여겨 만 가지의 거짓을 소멸하고 성실한 행위를 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108p
그러한 실마리를 통한 眞知와 實踐(始終之美)이란 구체적 방안의 제시는 퇴계가『성학십도』에서 강조하였던 수순의 논리에 근거한 修身의 방법과도 일치한다. 결국 전체적으로 볼 때 3조는 修身의 공부가 다름 아닌 정치의 근본이므로 바람직한 군주상을 위한 修身의 강조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서 밝혔듯이『성학십도』의 내용과 모순 되지 않는 일관성을 지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퇴계의 ‘修身을 통한 정치의 완성’이란 주제에 있어, 퇴계는 정치와 도덕의 관계를 사실과 가치ㆍ당위의 관계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오늘날의 도덕과 정치의 관계와 다른 관점임을 의미한다. 즉 퇴계는 도덕과 정치의 관계를 修身을 통한 정치의 완성이란 수순의 논리로써 동시성을 취하고 있다. 수순의 논리가 정립되는 한 도덕과 정치의 불일치는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도덕과 정치의 불일치는 선택의 논리로 인한 폐해 현상이다. 이러한 도덕과 정치의 관계에 있어 퇴계는 도덕을 가치ㆍ당위로 보지 않고 ‘관리 능력’으로 인식한다. 마음에서 몸으로의 수순은 동시에 마음에 의한 몸의 관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마음과 몸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게 되고, 설사 몸에 병이 생긴 경우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 까지 미치는 해결을 제시한다. 퇴계가 修身을 강조하면서 선조에게 요구하는 욕망의 억제 110p
는 마음의 대표적인 관리 능력이다. 여기서 도덕은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닌 바람직한 현실을 위한 현실의 관리가 되는 것이다. 달성하지 못할 당위의 강조는 억압으로 다가올 수 있다. 더욱이 달성하지 못할 내용의 것이라면 퇴계가 나이 어린 선조에게 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능력’으로서의 도덕은 ‘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일상생활을 통해 노력을 함으로써 도덕과 정치의 합일을 추구한다.
'능력'으로서의 도덕과 정치의 합일은 이렇듯 수순의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수순의 논리는 ‘태극도설’에서 살펴보았듯이 不可知라 하여 형이상을 외면하지 않는 자세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논리적 흐름은 퇴계가 6조에서 ‘하늘의 권애를 받을 것’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8p
물론 퇴계의 天에 관한 관념은 동중서의 災異說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만약 퇴계가 동중서가 생각한 것처럼 인격적인 天을 생각했었더라면 근세를 살았던 중세적 사상가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그러한 반동적인 사상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동중서의 災異說에 관하여 ‘재미있다’란 표현 118p
을 쓰고 있다. 그러나 퇴계는 안 보인다고 하여 天心을 배제하지는 않았다.(오히려 부자간의 관계로 비유하여 선조에게 설명하고 있다. 121p
) ‘어떻게 함으로써 천심을 받드는가?’의 문제는 수순의 논리를 통하여 ‘어떻게 바람직한 사회를 구성하는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럼으로써 ‘깊이 생각하고 익혀 강명하지 아니함이 없이 실지로 몸소 행한 연후에야 가히 천심을 향수하고 임금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게’ 118p
된다. 그러므로 하늘의 사랑을 계속 받기 위해서는 修身을 통해 백성의 뜻을 잘 수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修身만 된다면 백성의 의사수렴은 자연적으로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다. 이에 1조, 2조, 4조, 5조는 선조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修身의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1조와 2조의 경우는 선조의 특수한 왕위 계승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써 치밀한 퇴계의 현실 인식을 알 수 있게 한다.
1조와 2조에서 퇴계는 방계출신인 선조의 특수한 사정을 최대한 반영한다. 11대 중종, 12대 인종, 13대 명종, 14대 선조의 계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퇴계학보 제95집』「무진육조소에 나타난 퇴계의 정치철학」박상주.
중종의 둘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 소생의 장남이 인종이며, 인종이 후사 없이 불과 재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뜨니, 중종의 셋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소생이 명종이 되었다. 명종이 또한 후사 없이 죽자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인 덕흥군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난 鈞이 선조가 되었다. 따라서 명종과 선조는 숙질관계이지만 왕통의 관계 상 부자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조는 일국의 왕인 이상 血緣之情보다 王統之義를 더욱 중시해야만 한다. 선조는 仁孝로써 養家에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101p
1조에서 퇴계가 명시한 全仁孝는 개인적인 수양의 문제를 넘어선 왕통의 승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다. 여기서 仁은 사사로움이 배제된 공정함의 仁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로 말미암아 본생부모에 대한 선조의 섭섭함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 역시 이것을 예상하지만 102p
천리와 인륜의 문제에 있어 사사로움이 섞여들 수 없음을 이유로 仁孝를 강조한다. 103p
게다가 이러한 올바른 방법에 의거해야 본생부모도 잘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03p
2조에서 퇴계는 참소하는 말을 막아 兩宮을 친근하게 해야 한다(親兩宮)는 보다 구체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여기서 兩宮이란 1조에서 말한 養家와 本家가 아닌 선조가 거처하는 宮과 왕통 상 어머니대비인 명종비 인순왕후가 거처하는 宮을 일컫는다. 친인척 비리 및 정치보복의 문제, 왕가의 혼란은 兩宮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에 기인한다. 특히 참소와 이간이 많은 왕가의 구조적 특성상 104p
선조의 자강ㆍ자치능력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된다.
요는 인군의 자치여하에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자치만 한다면 또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105p
바라옵건데 전화께서는 주역의 가인의 뜻을 거울로 삼고 소학의 명륜의 훈을 법으로 삼아 자치를 엄하게 하시고… 105p
모든 참소와 이간을 막기 위한 첩경은 왕 자신의 바른 안목과 정성ㆍ義를 다하는 자세를 바탕으로 한 자치능력 즉 수신이다. 그러므로 군주된 자는 항상 정밀하게 살피고 살펴서 화근의 기미가 나타나면 그 기미가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만 한다. 바른 안목과 자치능력의 고양은 이 같은 결단력 있는 실천에 의해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1, 2조를 통하여 宮을 잘 다스리고 4, 5조를 통하여 백성을 잘 다스려야 한다. 4조에서는 유학의 정치관인 敎化가 등장한다. 물론 敎化의 근본적 방법은 선조 자신의 修身이다.
그 근본은 임금이 몸소 행하고 마음에 터득한 연후에 비로소 민생들이 일상생활에서 실용하도록 떳떳하게 가르치는 것이 근본이요 법률제도에 추종하고 문물만을 인습해서 지금 것은 변혁하고 옛 것을 스승으로 하여 모방하고 비교하는 것은 末이니 본은 먼저 하여야 하기 때문에 급하고 말은 뒤에 하여야 하기 때문에 늦은 것이옵니다. 112p
修身의 도로써 퇴계는 유학의 도를 강조한다. 퇴계가 보았을 때 수순의 논리는 ‘천명에서 나와 인간의 心의 표준을 세우고 나아가 일상생활의 바른 윤리를 세워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는 理法의 도’인 유학에 의해 실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은 굳이 유학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이 그냥 修身을 하면 된다. 일단 하면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修身의 노력도 없이 유학에 관한 의심으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올바른 군주의 모습이 아니다. 더욱이 유학 외의 학문이 학문 본래의 뜻도 아닌 사사로움을 숨긴 인물들의 출세수단으로 쓰이는 현실 114p
을 감안한다면, 유학의 도로써 전일해야한다는 퇴계의 주장은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결국 정치의 大本은 人心을 바르게 하는 것(正人心)에 있고 人心을 바르게 하는 데는 正學ㆍ正道에 바탕을 둔 군주 자신의 모범과 수행 즉 修身이 그 요체가 되는 것이다.
5장에서 퇴계는 言路를 트이게 할 것을 주장한다.(通耳目) 퇴계에 있어 言路는 국가 구성원들 간의 조화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다. 또한 퇴계는 대신에게 임금의 명령을 시행하고 정책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推腹心) 그럼으로써 왕과 백성, 국가기관 간의 협조ㆍ조화의 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퇴계는 신체은유를 통하여 올바른 國體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나라에 있어서 군주는 머리이며, 대신의 나라의 배이자 심이고 대간의 귀이자 눈입니다. 이 셋이 서로 받들고 합심하여야 각자의 일을 완성할 수 있으니 이는 나리의 본래의 모습으로 천하의 고금이 모두 다같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115p
만약 왕이 대신과 대간을 신임하지 않는다면 이는 배와 가슴, 눈과 귀를 떼어버리고 오직 머리 하나만 가지고 살려는 어리석은 행동과 다름없다. 115p
따라서 정치는 국가와 신하, 백성이 고유한 직분을 수행함으로써 일체성을 갖는 유기체여야 한다. 언뜻 보면 플라톤 식의 구조주의적인 시각일 수도 있겠으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만인의 修身을 강조하는 퇴계의 주장을 감안한다면 단순한 구조ㆍ기능주의적 국가관이 아님은 자명하다.
5. 결 론
우리는『무진육조소』3조에서 수순의 논리를 확인하고 6조를 통하여 수순의 시작을 인식한 다음 1, 2, 4, 5조를 통하여 어떻게 현실의 영역에 이르는가를 살펴보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순의 논리에 있어서 퇴계가 생각한 도덕과 정치의 합일은 가치ㆍ당위와 사실의 관계가 아닌 관리능력으로서의 도덕과 정치의 관계에서 도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성학십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수신 위주의 정치사상은 자칫 비현실적인 이상의 외침으로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도덕과 정치의 괴리현상에 기인한 것이다. 반면 도덕과 정치의 합일에 입각해서는 적극적인 현실에의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합일에 있어 당위와 현실의 만남은 새로운 억압으로 등장될 수 있다. ‘정치와 도덕 간의 괴리와 일치’라는 근대와 중세의 차이에 있어 언뜻 보면 퇴계 역시도 이러한 범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퇴계는 도덕을 당위보다는 ‘능력’으로 보았다. 그러한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우리는 도덕의 근본(天, 神…)과 주체(心)가 안 보인다하여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수순을 전제로 일상생활에서 끊임없는 노력(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나’의 소중함을 인식하여 현실과 ‘나’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할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할 수 있다. 또한 현실과 ‘내’모습에 비관하지 않고 일상에서 生의 힘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더 이상 정치와 도덕은 상호 모순적인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호혜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 이상 ‘투쟁과 폭력의 힘에 의한 원리’라는 왜곡된 정치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정치는 도덕이 전제되지 않는 한 의도적이든 무의도적이든 공존이 아닌 공멸의 합의로 전개될 따름이다. ‘나’를 이루는 마음과 몸이 따로따로가 아닌 이상 정치와 도덕 역시 분리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치와 문화』김비환. 박영사. 2005
『태동고전연구 제4집』「이퇴계의 ‘성학십도’ 연구」이광호. 1988
『유교사상연구 제20집』「유교의 종교적 성격과 오늘날 종교적 수행에의 응용방안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의 경우」이동희. 2004
『남명학연구 제16집』「퇴계의 『성학십도』:주자학의 이념과 성학의 설계도」한형조. 2003
『한국철학논집 제16집』「퇴계 이황의 문화관:『성학십도(聖學十圖)』를 중심으로」조춘염. 지준호 역. 2005
『퇴게학 제7집』「이황의 수양론 - 성학십도와 경을 중심으로」이해영. 1995
『대동문화연구 제24집』「퇴계의 성학에 관한 고찰 ≪성학십도≫를 중심으로」오석원. 1990
『퇴계학보 제94집』「무진육조소에 나타난 퇴계의 성학이념과 정치적 사유」정병석.
『퇴계학보 제95집』「무진육조소에 나타난 퇴계의 정치철학」박상주.
『국역 퇴계집Ⅰ』민족문화추진회. 1968
『성학십도』이광호. 홍익출판사. 2004
『Confucian Moral Self Cultivation』Philip.J.Ivanhoe. Hackett Publishing Company. 2005
|
현재위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