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자 의 윤 리 사 상
(仁과 禮를 중심으로)
1.들 어 가 며
90년대 후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한 동안 유교적 담론이 우리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뒤이어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란 책이 발간되었지만 판매량, 인지도 면에서 뒤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제목이 의미하듯 공자는 타도ㆍ숭상의 대상이 될 만큼 그렇게도 현재의 한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가? ‘공자’와 ‘살았다, 죽었다’의 의미관계는 도대체 어떠한 관계인가? 2000년에 이르러 이러한 유교에 관한 논쟁은 김용옥의 TV매체를 통한 「論語」,「道德經」강의를 통해 동양철학 전반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였다.「論語」란 책이 있는 줄도 몰랐고 공자가 뭐했던 사람인지도 모르는 대부분의 대중들에게 김용옥의 강의는 그의 탁월한 강의기법과 더불어 유교에 관한 크나큰 관심과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서기 2004년은 공기 2555년이다. 2500여 년 전의 사람이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한 영향력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孔子에 관한, 나아가 유교에 관한 논의는 21세기 資本主義 사회에서도 끊임없는 생명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한 가지 사상이 2500여년의 생명력을 가진다는 것은 인류가 창조한 그 어떤 것보다 긴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유학사상이 우리 역사 중 500년의 지배사상이였다는 점은 한국인들에게 보다 특수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500년의 시간동안 한 국가의 지배사상이 계속적으로 이어져 온다는 것은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단한 사실이다. 낡은 봉건적 이데올로기, 남녀차별의 근원, 비인간적 계급사회의 옹호논리 등의 비판적인 관점에서부터 자유주의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인류의 대안이라는 관점까지. 이렇듯 유학에 관한 다양한 평가가 있는 현대 한국에 있어서 우리의 작업 즉 孔子에 관한 고찰은 현대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2.공 자 이 전
원시 종교적 사회에서는 인간과 자연, 사람과 上帝의 구별이 뚜렷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연과 사회현상을 막론하고 모두 至高無上한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하며 절대 권위를 가진 超越者가 주재하는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자연현상에 관한 것과 인간사회에 관한 모든 것이 전부 神의 뜻으로 간주되어 그에 대해 畏敬心을 갖고 일정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神이 인간을 굽어 살피는 마음’이라는 仁의 원초적 의미와 ‘神에게 드리는 의식’이라는 禮의 원초적 의미는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 은 주 시 대
殷周시대는 邑제 연맹단계로서 다수의 토템적 성향의 씨족집단들이 한 邑을 중심으로 연합을 형성한 시기이다. 그러나 잉여생산, 인구의 증가는 씨족집단에서 분업적 성격의 모습인 계급ㆍ계층이라는 상하관계의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ㆍ경제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 새로이 형성된 지배계층은 사회 안정을 위한 社會統合理論이 필요하게 된다. 즉 殷周시대에는 토템적 성향의 씨족집단들을 통합할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上帝ㆍ天이다. 물론 考古學의 발달로 인해 중국의 고대문명은 단순한 왕조 교체의 수직적 계승 관계가 아닌 다원적 문명관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러한 시각에 입각하여 엄밀히 말하자면 上帝와 天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至高無上의 人格神이란 점을 강조한다면 天帝는 하나로 묶어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吉凶禍福의 주재자로서 上帝ㆍ天은 기상, 도시건설, 전쟁, 인간사의 吉凶, 수확 등의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占을 쳐서 모든 의문점을 판단하는(卜以決疑) 상황 하에선 인간은 숙명론적인 命을 받고(受)ㆍ듣고(聽)ㆍ두려워 할(畏)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이다. 결국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하늘인 것이다.(天人相分) 이러한 모습들을「書經」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나는 상제를 두려워 하니 감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이 이미 명령을 내려 그들의 덕을 바로잡도록 하셨거늘
하늘이 아마 우리 은나라의 명을 끝맺으시려는 것 같다 .... 하늘은 어찌하여 벌을 내리시지 않는가?
내가 태어난 것은 운명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닌가?
오직 하늘의 법을 삼가 집행하는 것이다.
하늘이 내리신 보배로운 명을 떨어뜨리지 말도록 하십시오.
이제 저는 큰 거북에 나아가 명을 받겠으니
하늘은 우리 집안에 재앙을 내리시어
나는 감히 하늘이 내리신 징벌을 거역하지 못하오.
점을 쳐서 하늘의 명을 물었소.
이외에도「書經」에 나온 인격ㆍ주재자적인 天帝의 모습은 수없이 많다. 결국 인간은 모든 일에 관하여 占(每事必卜)을 통해 하늘의 뜻을 파악ㆍ이행하는 天帝 중심의 패러다임 속에서 삶을 영위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殷周시대의 생활모습도 春秋의 혼란한 시대상황을 겪으며 큰 변혁을 맞게 된다.
2) 춘 추 시 대
周公이 닦아 놓은 周의 成康時代도 시간이 흘러 견융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도읍을 洛邑으로 옮기는 春秋時代로 접어든다. ‘天命靡常’이라는 통치자의 자숙과 애민을 중시하는 周의 사상도 점차 지도층의 타락과 무능으로 더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백성은 지배층이 잘 보살펴주고 보양해 줄 대상이 아닌 착취와 부역, 노동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백성들은 가난에 허덕이게 되고 전쟁과 사역에 동원되어 갖은 고생을 겪게 된다. 지배와 피지배의 대립 구조로 변화된 周 말기의 사회 상황 속에서 지배 계층의 내부 분열과 피지배 계층의 도전, 외부 이민족의 침입은 春秋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 속에서 親親ㆍ尊尊ㆍ賢賢의 봉건윤리 붕괴는 周禮의 해이를 가속시켰고, 더불어 전쟁과 흉년까지 겹친 백성들은 이제까지 의지하고 신봉하던 天, 祖上神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周 초기에 주창한 善, 德과 같은 덕목에 관한 믿음도 또한 점점 내팽개쳐 갔다. ‘더 이상 하늘은 사방의 백성을 고루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라는 天帝 관념에 대한 회의와 원망이 백성들 사이에 전파된 것이다. 즉 主宰天의 의식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고 속에서 현실적 고통의 증가는 天에 대한 원망적인 사고로의 전환을 촉진시켰다. 결국 天帝의 해체시기가 등장한 것이다.
하늘은 지금 무거운 고통을 내리시어 화란이 너무나 심하여...
불행하도다 하늘이여! 우리 백성들을 궁하게 만들지 않았어야 되는 것을...
하늘의 명은 일정치 않아 이토록 궁한 재난을 내리셨고
하늘이 사랑하지 않으시어 이러한 큰 환난을 내리셨네...
난리와 흉년을 내리셔서 천하 사람들을 죽이고 치게 하셨으니
하늘이 포학하심은 사람들이 올바로 생각하고 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하늘은 법도에 맞는 말은 믿지 않는가?
구슬까지 다 바쳤거늘 제 말은 들어주시지 않는군요...
하늘의 하느님은 저를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하늘의 하느님은 제게 남겨주시지 않으려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怨天ㆍ罵天詩의 등장은 획기적인 사상사적 전환의 모습이다. 天帝에 관한 이러한 회의와 원망은 春秋중기의 비종교적ㆍ비신화적인 방향으로 발전된다. 종래의 미신적이고 관념적인 선입견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자연현상은 자연 자체에서 파악하지 인간 외적인 虛像이나 神鬼에 의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春秋左傳」에 이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백성은 신의 주인이다. (民爲神主)
요괴한 일은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妖由人興)
길흉은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吉凶由人)
나라가 흥하려면 백성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國興聽民)
인간의 힘으로 자연을 극복한다. (人定勝天)
이러한 것들은 神鬼에 의한 문제해결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신의 주체적 능력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萌芽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主宰天에서부터 周禮가 붕괴되고 天思想이 동요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과연 인간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비로소 본격적인 仁禮윤리로의 전환이 孔子에 의해 시작된다.
2. 공 자 의 윤 리 사 상
1) 하늘에서 인간으로
天思想이 동요되고 周禮가 붕괴되는 혼란한 春秋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孔子는 과연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대안을 생각하였을까? 儒法鬪爭 사상가들이 말한 反動ㆍ保守로의 회귀를 주창하였는가? 아니면 새 시대를 위한 進步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였는가? 傳統과 未來라는 두 가지 방향을 고려해 볼 때 과연 孔子의 선택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仁과 禮를 등장시켰는지 ‘天’과 ‘人’의 관계적 측면 속에서 고찰해 보자.
공자는 괴이한 것, 무력, 난동, 귀신에 관해 말씀하지 않았다.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한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것을 묻자,
공자는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제사 지내야 할 귀신도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이다.
공자가 병이 들자 자로가 신에게 기도드릴 것을 청했다.
그러자 공자는 “그런 일이 있었느냐?”라고 말했다.
자로가 “있습니다. 뇌사에는 ‘너를 천지신명께 기도드리노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자는 “나는 그 같은 기도를 한 지 오래되었다!”라고 말했다.
孔子는 不言ㆍ罕言의 방법으로써 天에 관하여 不定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선생님께서 性과 天道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었다’라는 子貢의 말에서도 天에 대한 孔子의 이 같은 태도는 명백하다. 즉 지금까지의 天에 집중된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중시하는 방향의 전환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春秋時代에 나타난 인간 중심의 사유 전환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혼란 속의 인간의 삶에 관한 대안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天과 人의 매개체적인 命에 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간은 占을 통하여 聽命ㆍ受命ㆍ畏命의 태도를 취해 왔었다. 그러나 春秋의 시대적 혼란에 기인한 罵天ㆍ怨天의 등장은 이러한 수동적 입장의 근본적인 해체를 요구하였다. 더 이상 聽ㆍ受의 방법을 통한 命의 수용은 春秋時代 사람들에겐 무용한 방법 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孔子는 命을 어떤 식으로 보았는가?
공자가 말했다.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했었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다. 지금은 없다.”
백우가 병으로 앓아눕자 공자가 문병을 갔다. 문 밖에서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탄식했다.
“이럴 수가! 운명이란 말인가!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에 자하가 이렇게 말했다. “내 들으니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고 한다.
군자가 공경하고 과실이 없으며 남과 사귐에 공손하고 예가 있으면 사해의 모든 사람이 형제인데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다고 근심하는가?”
공자가 말했다.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명이며, 도가 장차 행해지지 않는 것도 명이다.
공백료가 그 명을 어찌하겠는가?”
孔子는 어쩔 수 없는 命의 영역을 수용하였다.
공자가 말했다. “부가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말채찍을 잡는 일이라도 하겠다.
그러나 만약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겠다.”
자로가 말했다. “..... 군자가 벼슬을 한다는 것은 그 의를 행하는 것이다. 도가 행해지지못할 것은 이 미 알고 있다.”
그러나 孔子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하여 수용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주체적 차원으로서의 행위를 등장시킨다. 즉 死生, 夭壽, 吉凶, 富貴, 禍福의 成功ㆍ失敗라는 기준의 命에 관한 패러다임을 是非ㆍ善惡의 義에 관한 패러다임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道가 행해지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命을 알고 있더라도) 君子라면 義를 다하여 道를 밝히고 지켜야 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장악할 수 없는 命에 의해 한계를 긋는 피동적인 인생의 방향에서, 孔子는 義라는 주체적 자각과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天과 人의 관계에서 하향이라는 일방적 방향으로부터 상향적 방향으로 바뀌는 「孟子」 「易傳」 「中庸」의 사상적 맹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命은 받아들여 敬畏하는 것이 아닌 知命이 되는 것이며 命의 제한을 통한 義의 확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기준은 效用ㆍ功利性이 아닌 正堂ㆍ當爲性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司馬遷이「史記」에서 말한 하늘에 관한 물음이 이러한 변화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당연히 해야 할 것’을 실천하는 孔子의 모습은 命의 제한을 통한 義의 확대라는 義命合一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命의 수용방법의 변화를 통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사람이 타물을 접하는 태도의 변화 즉 주체적인 ‘나’ 자신의 강조라 할 수 있다. 주체적인 ‘나’ 자신의 강조는 禮와 더불어 仁의 존재를 설명하는 한 근거가 된다.
2) 공자의 禮
春秋時代의 대표적 관념은 周禮이다. 이미 原始宗敎적 의미에서 벗어나 모든 人文세계를 포괄하는 공통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人文主義의 발달로 인하여 禮는 神과 인간 사이의 儀式이나 관계에 제한되지 않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의 내용을 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禮의 내용을 孔子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周禮의 붕괴는 ‘나’와 만물, ‘나’와 ‘너’의 단절과 周禮의 유래가 되는 尊長意識의 약화와 名分이 혼란한 사회적 상황을 초래하였다. 그에 따라 春秋後期에는 禮와 儀式을 구분하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듯 禮에 관한 儀式적 측면의 대두가 특이한 사항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관하여 孔子의 견해가 子罕 3장에 나타나있다. 삼베와 명주를 통하여 합리성을 고려하고 있으며 堂上下를 통하여 교만이라는 그릇됨을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儀式과 분리된 禮의 根本에 관하여 林放과 孔子의 문답은 孔子의 생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하철에서 노인을 위해 자리 양보를 해야 된다는 禮는 내가 하기 싫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하기 싫어도 양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孔子가 말한 진정한 禮가 될 수 없다. 禮는 內外가 겸비될 때만이 진정한 禮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禮는 마치 ‘그림은 바탕이 서고 난 후의 문제이다’(繪事後素)의 비유처럼 仁이라는 사람으로서의 바탕이 서고 난 후의 문제이다. 여기서 孔子는 周禮가 붕괴된 원인을 찾았으며 이에 ‘나’에 관한 인격적 수양의 문제를 강조한 것이다. 겉치레의 禮儀의 완비는 외적으로 훌륭한 것 같지만 내적으로 빈약하여 禮의 본질이 아니다. 秩序의 혼란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선 각 개인의 인격이 秩序의 혼란을 치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치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禮를 행하는 ‘나’라는 점에서 仁의 등장은 보다 높은 禮에 관한 규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중심의 관점에서 禮는 仁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덕목인 것이다.
3) 공자의 仁
이렇듯 義命合一과 禮를 보완하는 측면에서 孔子는 ‘나’라는 주체적 개인을 중심으로, ‘너’ ‘天’과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덕목이 바로 ‘仁’인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仁이라는 덕목은 孔子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자각적이고 실천적 주체로서의 규정이라는 의미에서 仁을 사용한 것은 공자에서 비롯되었다.
안연이 인에 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사심을 극복하고 예를 실천하는 것이 인이다. 하루라도 사심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간다면 이 세상 누구로부터도 어질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인을 행하는 일 이 내게 달려있지 남에게 달려 있겠느냐?”
인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인을 바라기만 하면 인은 곁에 있다.
외적인 것에서부터 삶의 근원을 찾지 않고 ‘나’로부터 찾는, 개개인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孔子의 모습에서 ‘나’라고 하는 인간의 심리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仁에 관한 여러 덕목들이 제시된다. 예전이나 지금의 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내용은 仁이 모든 덕목의 총칭이라는 점이다. 사람다움, 우리, 孝, 忠, 恕, 中庸, 義, 智, 禮, 信, 恭, 寬, 惠, 敏, 愛, 生, 공동창조성 등이 바로 그렇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덕목의 총칭으로서의 仁에 관한 實踐적 측면이다.
중궁이 인에 관해 묻자 공자는 “문을 나가서는 큰손님을 만남 듯이 하고 백성을 부리기는 큰제사를 받들 듯이 하고 자기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라고 대답했다.
공자가 말했다. “그것은 서일 것이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공자가 말했다. “....인이란 내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내가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가까운 자신을 가지고 남의 처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인을 행하는 방법이다.”
결국 仁을 행하는 방법은 자기의 경우로부터 남의 처지를 유추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能近取譬의 방법은 推己及人, 絜矩之道, 克己復禮와 상통하며 曾子가 말한 孔子의 일관된 道인 忠恕를 뜻하는 것이다. 안으로는 仁으로써 ‘나’를 완성하고 밖으로는 ‘너’를 완성하여 상호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아는 차원에서만 머문다면 의미가 없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가 인을 버리면 어떻게 군자라는 이름을 이루겠는가?
군자는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어기지 않고 급한 때에라도 반드시 그것을 지키며 역경을 당하여 도 반드시 이렇게 한다.”
공자가 말했다. “인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이 중대하고 갈 길이 멀기 때 문이다. 인으로 자신의 책임을 삼으니 막중하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끝이 나니 멀지 아니한가?”
실제 생활 속의 實踐을 떠나서는 절대로 仁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종일관 철저히 행해야 하고 利害得失 때문에 바꾸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지사와 인자는 삶을 구하여 인을 해치는 일이 없으며 몸 바쳐 인을 이룩하는 경우는 있다.”
육체적인 생명까지도 포기하여 仁을 완성하는 것을 강조한 孔子의 말에서, 仁은 유한한 인간의 존재를 초월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무한한 가치로까지 승화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채인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仁을 실천한다는 것은 주관정신(덕성을 완성하는 것, 仁者가 되는 것, 성인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객관정신(내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내가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게 하는 것, 수양을 하여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 등은 모두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객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가정과 국가의 천하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을 표현하는 것이며, 동시에 절대 정신(아래로부터 배워서 위를 총달하고 仁을 실천하여 하늘을 알며 하늘과 사람이 도덕적으로 하나가 되어 사물과 대립되지 않는 경지)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때에 인간과 우주 만물의 관계는 하나로서 새롭게 정립되는 것이다.(天人合一) 그것은 孔子가 70세에 도달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나 도를 넘지 않는다.”(從心所欲不踰矩) 라는 자유의 경지인 것이다.
4) 공 자 이 후
孔子는 당시 周禮의 변화와 붕괴에 직면하여, 天에 관한 새로운 관계적 패러다임으로서 인간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의 근거로서 孔子는 仁을 제시하였으며 禮를 통하여 단절된 ‘나’와 대상 간의 접근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仁을 해야 되는가에 관한 논증의 문제가 제기 될 수 있을 것이다. 孔子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황에 있어서 孔子의 이 같은 이론은 대중의 호응을 얻기에는 역부족 이였다. 너무 쉽게 天을 버리고 道德을 인간윤리화 해버린 孔子의 논의는 합리성의 의식이 덜 발달된 인민들에겐 너무 무리한 요구였던 것이다. 더욱이 天을 버린 이유 설명의 복잡함과 弱肉强食의 현실에 관한 규범적 당위적인 가치의 요구는 法家라는 현실주의의 태동을 암시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3. 맺 으 며
春秋時代를 혼란으로 보느냐, 발전으로 보느냐에 관한 논의는 논쟁의 소지가 많은 부분이다. 명백히 孔子는 春秋時代를 周禮가 붕괴된 혼란의 시대로 보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孔子는 보수반동의 대표자로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天에 대한 인간 주체성으로서의 仁을 연계시키고 전통적 관습이나 규범의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孔子임을 생각할 때 단순한 보수반동의 결론은 성급한 생각이라 단정 짓고 싶다. ‘實踐’이라는 ‘현실 중시’의 방안을 강조하고, 天의 人格性을 거세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을 보다 잘 이해하고자 했던 孔子의 사상이야말로 유학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의 근원이 아닐까? 인간다움이라는 仁과 그것의 실천이라는 禮의 덕목이 인간의 삶과 인간관계를 논의하는 사상이기에,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 한 유학은 계속적인 생명력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仁과 禮의 관계를 통하여 본 실천적 덕목으로서의 禮는 경직화된 사회의 왜곡된 모습을 보완할 수 있다. 실천 윤리의 중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르지 않은 지식의 실천은 그 위험성이 크다. 그런 이유 하에 孔子의 仁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왜곡된 仁의 실천이 아닌 禮를 통한 올바른 仁의 실천은 붕괴된 관계를 다시금 재정립할 수 있는 요건을 제공한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붕괴된 현대인들은 허무 및 쾌락주의의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너와의 관계에서도 개인주의가 극대화된 이기주의의 만연은 ‘나와 너’ 사이의 단절 위기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집합적 공중사회’가 잘 나타내듯, 만인 속에서의 소외 문제는 과학의 발달을 통하여 기계 및 물질에 의한 소외로까지 발전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하는 엽기적인 범죄 문제도 너와의 단절 나아가 사회와의 단절을 그 원인으로 하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게다가 새로이 부각되는 환경 문제 즉 ‘天과 나와의 관계’도 간단히 다루기에는 너무나도 큰 문제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서 관계적인 仁의 논리는 새로운 관계정립에 있어 큰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새로운 관계정립의 틀을 의미하는 禮야 말로 보다 실천적이고 보다 구체적인 논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관계적 문제뿐만 아니라 전통의 형식에 관한 문제에서도 공자의 禮論은 큰 빛을 발휘한다. 전통에 관한 왜곡된 인식에 근거한 형식 불변의 문제는 서구사상에 익숙한 신세대들과의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여기에서 가치 우열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갈등적 상황의 지속은 국가 통합을 방해하는 큰 악재로 다가올 수 있다. 정신없는 형식, 형식없는 정신의 문제는 일찍이 孔子가 지적한 문제 담론들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같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정신과 형식의 문제는 文質로서 유가에서 강조했던 담론들이다. 특히 仁과 禮의 관계로 대표되는 이러한 담론들은 사회과학으로 발전 가능한 충분한 여건을 마련한다. 한국 사회가 본래의 고귀한 정신을 망각하고 형식의 불변에만 주의를 기울인 결과, 사회 분열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성이 있다.
時中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유가적 사유를 감안 하여 孔子의 윤리관을 재해석할 수 있다면 현대 한국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라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孔子의 윤리관은 인생을 보다 윤택하게 영위할 수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인간을 보다 잘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孔子의 知新적 태도를 비추어 볼 때, 제악의 근원을 제도의 탓으로만 돌리고 인간과 인간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 않는 현대 인류는 반성해야 마땅하다. 몸과 마음, 인간과 물질, 개인과 공동체라는 거대한 논의 담론의 양 갈래 속에서 현대 인류가 처한 自由主義 및 個人主義의 해악을 완화시킬 수 있는 사상이 곧 孔子의 사상인 것이다. 마음과 인간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유학적 사상이야말로 인간의 문제를 보다 근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현대 인류의 숙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답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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