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지금 예인가? (공맹순 禮論의 현대적 적용 2)
공자, 맹자, 순자의 禮論에 관하여 장황하게 살펴본 이유는 禮의 다양한 의미를 세 사람의 사상적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仁의 실천적 덕목으로서의 禮, 도덕적 본성을 표현하는 틀로서의 禮, 사회 규범적 측면으로서의 禮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禮의 다양한 정의로부터 도출되는 禮의 특성은 개인주의와 ‘우리주의’의 혼란으로 야기된 한국의 위기 해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仁과 禮의 관계를 통하여 본 실천적 덕목으로서의 禮는 경직화된 사회의 왜곡된 모습을 보완할 수 있다. 실천 윤리의 중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르지 않은 지식의 실천은 그 위험성이 크다. 그런 이유 하에 본문에서는 공자의 仁을 재조명한 것이다. 왜곡된 仁의 실천이 아닌 禮를 통한 올바른 仁의 실천은 붕괴된 관계를 다시금 재정립할 수 있는 요건을 제공한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붕괴된 현대인들은 허무 및 쾌락주의의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너와의 관계에서도 개인주의가 극대화된 이기주의의 만연은 나와 너 사이의 단절 위기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집합적 공중사회가 잘 나타내듯, 만인 속에서의 소외 문제는 과학의 발달을 통하여 기계 및 물질에 의한 소외로까지 발전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하는 엽기적인 범죄 문제도 너와의 단절 나아가 사회와의 단절을 그 원인으로 하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게다가 새로이 부각되는 환경 문제 즉 天과 나와의 관계도 간단히 다루기에는 너무나도 큰 문제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서 관계적인 仁의 논리는 새로운 관계정립에 있어 큰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새로운 관계정립의 틀을 의미하는 禮야 말로 보다 실천적이고 보다 구체적인 논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관계적 문제뿐만 아니라 전통의 형식에 관한 문제에서도 공자의 禮論은 큰 빛을 발휘한다. 전통에 관한 왜곡된 인식에 근거한 형식 불변의 문제는 서구사상에 익숙한 신세대들과의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여기에서 가치 우열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갈등적 상황의 지속은 국가 통합을 방해하는 큰 악재로 다가올 수 있다. 정신 없는 형식, 형식 없는 정신의 문제는 일찍이 공자가 지적한 문제 담론들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같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정신과 형식의 문제는 文質로서 유가에서 강조했던 담론들이다. 특히 仁과 禮의 관계로 대표되는 이러한 담론들은 사회과학으로 발전 가능한 충분한 여건을 마련한다. 한국 사회가 본래의 고귀한 정신을 망각하고 형식의 불변에만 주의를 기울인 결과, 사회 분열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성이 있다.
무비판적인 개인주의의 수용은 머리와 가슴의 혼란이라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맹자의 禮論은 머리의 가슴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이론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도덕성은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소중한 덕목이다. 지난 50여 년간 후진국의 불명예에서 탈피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인재양성 이였다. 인재는 곧 知者를 의미한다. 그 인간의 도덕성은 특정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항목이 아니었다. 오히려 도덕적인 사람을 사회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럴 만도 하다. 도덕성이라는 개념은 쉽게 객관화할 수 없을뿐더러 지식과는 다르게 장기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적 상황을 통해 남게 된 것은 사람 간의 불신과 속임뿐이다. 확고한 도덕성의 계발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누구라도 정치인이 되면 차떼기를 할 것이다. 부정부패, 뇌물수수 등의 각종 부패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이 도덕성의 고양이라 한다면 아직까지도 코웃음 칠 것인가? 제국주의 시대를 평가하며 누구나가 주장했던 것이 힘의 배양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같은 전통 아닌 전통적인 현대 한국의 모습도 우리 자신만의 잘못이 아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제국주의 시대를 평가하며 힘이 없었던 우리들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침략한 제국주의 국가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는 도덕성의 확립을 사회적으로 배양해야 할 때이다. 물론 힘을 키우지 말자라는 극단적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가치로서 도덕성은 강조되어야 한다. 고대 동양에서는 위정자들에 대하여 知者보다는 仁者를 더 중요시 하였다. 학교에서의 교육 역시 지식 습득보다는 인간됨을 우선으로 하였다. 灑掃應對에서부터 治國平天下의 단계적 논의는 도덕성의 배양을 전제로 한다. 인간이 아닌 인간은 제 한 몸 다스리기도 힘이 든다. 동굴을 벗어나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전 주저하는 플라톤의 哲人과는 달리, 聖人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식을 보듯이, 만인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아 주저하는 감정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 같은 사람이 위정자가 되는 국가와 남보다 똑똑하여 남의 나쁜 점만 재빠르게 간파하고 무지한 자를 속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위정자가 되는 국가는 비교조차도 전자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우리주의’의 사회적 전개를 위하여 맹자의 禮論은 현대 한국의 위기상황에 대하여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순자의 禮論은 기본적 가정부터가 ‘우리주의’와는 다소 먼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위기 상황의 극복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점은 맹자의 禮論 못지않게 많다. 순자의 禮는 교육을 통하여 禮를 내면화시킴으로써 사회적 질서의 추구를 강조한다. 맹자 禮論의 형이상학적인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사회적 측면의 禮를 강조한 것이다. 이 같은 성격은 현재 유도회 교육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범국민실천예절운동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개인적 측면의 자발성은 이상적인 구호로 머물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자발성을 하나의 핵을 중심으로 끌어들이면서 사회적인 운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효과를 노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측면을 강조한 순자의 禮論이 정치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에는 禮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위정자가 드물다. 한국 위정자는 실업 구제를 위한 방법으로써 예절지도사 양성 수준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정치이데올로기화의 걱정은 기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위정자들이 보다 넓은 시각을 견지한다면 올바른 전통에 관한 관심, 특히 그 중에서 사회성을 많이 가진 禮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리사욕에 치우친 나머지 국가에 관한 관심이 없는 관계로 禮 중심의 사회운동은 특정 집단을 제외하고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禮에 관한 잘못된 모습의 유지는 젊은 세대 및 여성단체로부터 타도 대상 1위라는 왜곡된 누명을 쓰도록 하고 있다. 사회규범으로서의 禮는 어느 한 특정 집단만을 옹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느 한 특정 집단만이 강조해야 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모습을 띄지 않는다면 禮의 사회성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우리주의’를 상실한 한국인들에게 순자의 禮論은 보다 나은 시대적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주의’의 전통을 잃은 한국인들에게 규범적인 禮論은 한국 사회에 있어 보다 현실성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치유를 감안한다면 이 같은 논리는 반드시 한계를 가진다. 하지만 사회적 분위기의 조성 없는 禮를 통한 사회개혁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만이 들 뿐이다.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후에 개인적으로 더 공부할 수 있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아니면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막무가내로 공부하라고 외치는 것이 더 효과적인가? 댐에서 새는 한 방울의 물이 엄청난 양의 물을 예고하는 것과 같이 사회적 운동으로서의 禮 강조는 혼란에 대한 또 하나의 대안으로서 맹자의 禮論을 보완할 수 있는 기초적 방법의 틀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온순한 소들이 있었다. 어느 날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소들은 호랑이처럼 힘을 얻어야 살 수 있다는 결론을 내게 된다. 그래서 자신들과 호랑이가 무엇이 다른지 연구하게 된다. 연구 결과 호랑이와 자신들은 잠자고 배설하는 등의 모든 행위가 비슷했지만, 호랑이는 고기를 먹고 자신들은 풀을 먹는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소들은 발견했다. 그리하여 소들은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먹던 풀을 모두 불 태워버렸다. 50여 년 후 소들은 광우병에 걸려 호랑이가 습격할 때 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제는 풀을 먹으려고 해도 다 태워버린지라 먹을 풀도 없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미래의 한국 사회를 만들어 갈 禮에 관하여 지난 세기처럼 왜곡된 시각으로 禮를 파악해서는 안 된다. ‘우리’라는 주체의식을 버려가면서 서구를 추종하는 것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머리와 가슴의 분리라는 특수한 문제 상황을 겪는 한국인들에게 禮는 머리의 가슴화라는 작업(풀을 먹는 작업)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왜 禮인가에 대한 해답이 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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