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 영업을 아주 오랫동안 한 친구와 육회를 앞에 두고 두어 시간 한담(閑談)을 나눴습니다. 얘기 끝에 내가 수학과 과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자, 그 친구가 명쾌하게 선(線)을 가르더군요. 살면서 미분, 적분, 방정식, 인수분해가 무슨 도움이 되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치 않으며 살아가는 지혜가 바로 수(手)라고 말합니다.
수학의 수(數)자가 아닌 손 수(手)자 말입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없나’할 때의 ‘수’말입니다. ‘자네 글을 보면 수가 무궁무진하던데, 그깟 학교때 수학 모르는 게 무슨 콤플렉스냐’는 일도양단의 얘기였습니다. 수학은 카드 계산할 정도의 수 개념만 갖고 있으면 사는 데 아무 불편사항이 없다는 거지요.
바둑을 보세요. 얼마나 수가 무궁무진한지요.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대수(無量大數)입니다. 국수 이창호의 뇌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마 3급만 돼도 최소한 다섯 수는 미리 생각하며 돌을 놓는답니다. “뭐, 그런 수(手) 말이야?” 재미있기도 하고 맞는 말인 것도 같아 놀라 반문했습니다. “맞아. 임마. 너는 대단한 수를 가지고 있어. 그 수만 있으면 뭔 걱정이냐” 과연 그럴까요? 어쨌든 쪼금 유쾌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친구의 또다른 테마의 얘기가 일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유익하여 노트에 막 적어놓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얼’을 중요시한 나라였답니다. 얼이란 무엇인가요? 영어로 spirit를 말하겠지요. 그렇다고 딱 영혼이라고만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얼과 혼의 뜻과 뉘앙스도 좀 다르지요. 우리는 모두 삼신할미(삼신할머니, 삼시랑)의 점지를 받아 태어난 것이랍니다. 삼신이란 단군신화의 환인, 환웅, 단군을 이르기도 하지만 천,지,인을 주재하는 신들을 이른다죠.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기 까지는 천지인 3재(三才)의 정령(얼)이 어울러야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얼토당토않다의 ‘얼토당토’도 어원학적으로 얼을 중요시한 조상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말이랍니다. 얼토는 ‘얼의 땅’이며 당토는 ‘단군의 땅’이랍니다. 얼토당토않다는 말은 도무지 가당치 않다는 의미로 쓰이지요. 얼의 나라, 단군의 나라가 아니면 엉터리가 없다는 뜻이라는 거지요. ‘얼굴’도 ‘얼로 통하는 굴’이라는 의미랍니다. ‘얼차려’의 얼도 ‘정신 차리랴’는 뜻의 얼이랍니다. ‘얼빠진 놈’이라는 말도 그렇지요. 얼(정신)이 없는 사람은 고래로 아예 사람취급을 안했나 봅니다. 그러고보니 ‘얼’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고 강조했는지 알겠습니다. 얼빠지는 일이 있어도 얼간이가 되지 않고 얼차리고(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습니다.
저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야, 다석 유영모선생이라고 아냐’ 모른다는 대답에 ‘나도 제대로 읽고 연구해본 적은 없지만 돌아가신 날까지 ’우리의 얼‘에 대하여 평생 천착한 사람이야’ ‘그분은 사람을 3가지로 나눴어. ’얼나, 몸나, 제나‘라고 말이야. 사는 날을 일수로 계산하여 수십년간 일기를 쓴 게 ’다석일기‘라는 책으로 나왔어. 함석헌선생의 스승이었지’ 저 자하문밖에서 농사를 짓고 산 은자(隱者)였어. 사서삼경을 순우리말로 풀어 가르쳤지‘. 같잖은 놈들이 무슨 말을 할 때는 ’알량한 지식’을 자랑합니다. 저도 뭐가뭔지 모르면서. 제가 항상 그 꼬라지랍니다.
점입가경입니다. 우리말 ‘한’의 뜻에 대하여 말합니다. ‘한'에는 ’크다, 같다‘는 뜻이 있습니다. 무궁하다는 뜻도 있지요.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조물주 God는 ’한울님‘입니다. ’한 우리님‘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한강‘은 엄청 큰 가람을 말합니다. ’한우리‘는 ’같은 울타리‘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큰아이 이름을 ’한울‘로 지은 까닭도 사실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국호(國號)에 대하여 유감이랍니다. '대한민국'은 '한민국'이 되어야 한답니다. 대(大)자가 '한'앞에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거지요. '한'이 '가장 큰'이라는 뜻으로 중첩이 되며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우리‘를 강조했습니다. ’우리 마누라‘ ’우리 형‘ ;우리 남편' 할 때의 우리는 분명히 ’my'이지 ‘our'가 아닌 데도, 입에 붙어다니는 게 ’우리‘입니다. 그것은 우리 피에 선천적으로 배인 공동체의식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소유격이 아닙니다. 마을마다 있은 '두레'를 생각해봐도 우리 민족은 얼마나 이웃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전공하는 '우리 아내'는 말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흐름이 있다구요. 실제 '내 엄마' '나의 집'이라고 말한답니다. 그럴 때마다 "얘야, 우리 말에 '나의 집' '나의 엄마'란 말은 없단다. '우리 엄마'가 맞아. 우리는 소유격이 아니란다"고 말한답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 아이들, 손자는 '우리'를 말하는 '우리 세대'를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되겠지요. 그러기 전에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을 ’너와 나‘ ’our 사상‘으로 승화시켜도 좋을 것같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말의 뿌리중 ‘씨’가 있습니다. 전라도에선 자기 할아버지나 친척할아버지를 부를 때 ‘하나씨’라고 부릅니다. 이때 ‘하나씨’는 ‘하나의 씨(정자)’라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랍니다. ‘한번 유전자는 죽어도 영생불사의 유전자(움)'라는군요. 말하자면 단군할아버지의 유전자가 우리 몸에서 똑같은 유전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DNA는 불사조랍니다. 정말 그렇다면 무서운(?) 일입니다. 세상 조화가, 사람사는 이치가 이렇게 되어있다면 참 조심하고 착하게 살 일 아닌가요. 할아버지의 씨가 바로 아버지의 씨이고, 아버지의 씨가 나의 씨이며 나의 씨가 나의 아들의 씨라는 말입니다. 웬지 섬뜩했습니다. 그냥 유전되는 성질이 몇 개 있겠지, 하고 대충 생각했다가 ’씨‘의 본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니 느낀 게 많았습니다. 씨는 또한 '알'(난자)을 만나야 제 노릇을 할 수있지요. 씨알머리가 없어서야 무슨 일을 할 수가 있나요. 우리 어머니는 선산의 3대 조부묘 앞에서 늘 그런답니다. '어찌 그렇게 좋은 씨를 냉겨주싯소' 이 말을 여러 차례 들은 제 장형이 어제 그러데요. '어머니, 그 말이 맞다고 해도 며느리들 앞에서는 하지 마세요. 듣기에 따라서는 밭 탓하는 걸로 듣지 않겠소' 그 말도 맞긴 맞지만, 80이 다 된 어머니가 젊은 며느리 마음상할 것까지 염려하여 이것저것 가려 말할 수가 있나요.
뭐, 개똥철학자의 궤변인가요? 만약 궤변이라고 하면 또 어때요? 오늘은 그 친구 덕분에 ‘얼’과 ‘수’와 ‘씨’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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