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묘지를 조성하여 11년째 매년 3월1일(삼일절)을 기해 시제(시향.산제사)를 지냈습니다. 대개는 시월에 많이 지내지요. 그런데 삼일절 전후하여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통에 여자들이 일하기가 어설프게 그지없어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하여 올해부터는 한식전후 토요일에 지내기로 하였지요. 전날밤 내려가야 하는데, 또 그놈의 술이 말썽이었습니다. 모처럼 시내 나가는 길에 선배와 막걸리 소주를 먹어대는 통에 고향 내려갈 약속도 잊은 거지요. 아내의 추상같은 꾸중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요.
새벽 3시.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아내를 깨워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계시던 부모님과 세 분 형님의 준엄한 꾸중이 시작됩니다. ‘무슨 놈의 술을 똥구멍으로 먹냐’ 둘째형의 막말입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도 끊을테니까 너도 이참에 끊자” “아버지, 그건 아니고요...” 참으로 이런 불효자가 없습니다. 셋째형의 말이 귀에 꽂힙니다. “다 좋네. 부모, 형제는 맨날맨날 안보니까 잘 모르지만, 동생 정말 계속 그러다간 제수씨한테 쫓겨나네. 이제 동생 술로 인한 스트레스가 제수씨 목까지 찼다고 하데” 어머니는 울먹입니다. “야, 니가 시방도 청년인 줄 아냐. 내일이 오십여, 이놈아. 젊은 때도 너는 술을 못이겼어, 야가. 술만 좋아허지. 상 밑에 빈컵을 놨두고 몰래몰래 비워버리라잉”
조상님께 제사지내는 아침에 5대손 00 술 때문에 죽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술을 끊어야 할까요? 그러나 술은 끊지 못합니다. 단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먼저 술자리는 만들지 않겠다는 거하고(열이면 일곱은 적극적으로 만듦), 소주 1병(7잔)이상은 넘지 않겠다는 것 정도이지요. 필름이 끊어진다거나 소지품을 잃어버린다면 제가 먼저 이 세상을 하직하겠다는 ‘야무진’ 각오는 말할 수 있지요.
이제 갈 데까지 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개망나니는 아닙니다. 잦은 술에 많은 주량에 질릴 만도 하겠지요. 당신 아버지(교육공무원. 술도 입에 대지 않음)의 규칙적인 삶에 익숙한 저의 아내는 이해하기 힘들었겠지요. 그 세월이 20년이니 발로 차서 집밖으로 내쫓아다 할 말은 없습니다. 빈손으로 나와 홀로 서야겠지요. 다 주겠어요. 집은 물론이고 월급(백수가 웬 월급?)이 차압된다해도 할 수 없지요.
술 최대한 자제하겠습니다. 마신다고 해도 이제 나의 의지로 마시지 않겠으며 최소한 연짱(연일)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가 늦게 들어오는 화요일, 목요일은 먼저 아내와 합의가 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최대한 소주 일병(7잔) 내지 10잔를 넘지 않겠습니다. 폭탄주로 정신 잃지 않겠습니다. 이 나이에 길바닥에 쓰러져 잔다든지, 필름이 끊겨 해롱해롱해서야 되겠습니까. 사회적인 status가 있지 않나요. 만천하에 약속을 해야 겠습니다. 이제 나도 열심히 살아보아야 겠어요. 어디 술 때문에 이혼당하고 혼자 홀애비로 살아가서야 되겠습니까.
어쨌든 그렇게 제사는 시작되었습니다. 날씨가 좋으니 대가족 소풍나온 날 같습니다. 산속에서 긴급 가족회의가 열렸습니다. 내년부터는 식구별로 가족묘 주위에 기념식수를 하자. 10년, 20년되다보면 온가족의 추억이 담겨 있지 않겠느냐. 내년부터는 3월 마지막 토요일(중고교 학교 쉬는 날)로 정하자. 손자들이 와서 일가친척하고 어울려야 하고 숭조(崇祖)사상의 의미도 알아야 하고. 음식은 대행하는 업체에 맡겨 비용을 6형제가 똑같이 나누자. 올해는 삼재가 있다고 하니까 내년에 산일(부모님, 작은 아버지-어머니 묘를 미리 표시해놓고(치표라고 함) 우리들의 자리도 계단으로 정리해놓는 일)을 하자. 작은집은 종교가 틀리므로 선산으로 오는 것은 작은집 가족회의에서 정해 알려달라. 벌초는 추석 2-3주전 토요일에 6형제가 하자. 정 못오는 사람은 ‘궐‘을 내자. 한산소곡주로 음복을 하며 이런저런 쌓인 이야기들을 합니다.
제사가 끝난 후 ‘조상옷’ 태우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조상옷이란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지 수십년내에 망자의 정장을 마련하여 무덤앞에서 태우면 후손들의 앞날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 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옷 두 벌을 상석에서 태우며 못다한 효도를 하는 듯이 아버지는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오구굿이라는 것도 이런 의식이라고 하더군요. 예전엔 땅에 묻고 5-6년후 탈골(살이 다 썪음)이 되면 무덤을 열러 백골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줘야 효자라고 했다지요.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했습니다. “어머니, 세상 바람 한번 쐬세요”라고 말하면서 나무칼로 뼈에 완전히 빠지지 않은 육진을 긁어내셨습니다. 이런 의식을 통풍(通風)이라고 한다는군요.
서너 시간만에 또 부랴부랴 서울로 분당으로 어디로 뿔뿔히 흩어지는 아들, 조카들을 보며 못내 서운해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뒤로 하고 고향을 떠납니다. “안녕히 계세요. 6월말 아버지 생신때 올게요” 그때까지 먹으라고 막 정미한 쌀을 또 몇 푸대 트렁크에 실습니다. 하여간 자식들은 부모 등골 빼먹는 기계입니다. 쌀값은커녕 용돈도 드리지 못하는 막내에게 서운할까요.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빌빌거리는 아들 못도와주는 게 더 안타깝다며 며느리 보기가 민망하다는 어머니, 이제 걱정마세요. 곧 넥타이 차고 대접받으며 번듯한 직장 다니게 될 거예요. 그때 월급 한번 못받은 걸로 치고 몽땅 드릴게요.
한식 전후인지라 성묘객과 봄 나들이나온 사람들로 토요일 오후인데도 천안에서부터 막힙니다. 정말 대단한 나라입니다. 이 수많은 차들의 기름은 어디에서 온 건가요? 2시에 출발했는데 6시30분이 되도록 안성 좀 지났습니다. 기흥IC에서 나온 직후 좌회전하여 150여M만 가면 음식점을 하는 고등학교 친구가 있습니다. 식구를 끌고 느닷없이 들렀습니다. 반색을 하는 친구와 약간의 회포를 풀고 생등심을 시켰습니다. 마블링(marbling)이라고 지방이 고르게 퍼진 꽃등심은 정말 보기에 좋았습니다. 호박죽으로 입맛을 돋운후 고기를 먹는데 문외한이 봐도 A급인 것 같았어요. 농협 하나로에서 친구가 매일아침 직접 사온답니다. 건초로 키운 한우고기랍니다. 척 보면 안답니다.
저는 그런 지식을 가진 친구가 부러웠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니까요. 저같은 백수건달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서울로 대학간다고 했을 때 한 말이 생각납니다. “야, 서울은 똥통의 구더기마냥 사람들이 득시글득시글거린다고 허드라. 긍게 차돌맨치로 단단허지 않으먼 못살아간다. 꼭 냇가에 차돌을 기억혀라잉” 그렇지요. 정말 구더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덩케덩케 살아가는 서울. 눈 감으면 코도 베어갈 서울. 그 서울에서 25년째 살면서 아무 것도 해놓은 것이 없습니다. 나는 늘 이런 점이 후회됩니다. 아, 차돌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저 곱돌처럼 살았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늘 각골명심했어야 하는데, 물러터지기가 호박보다 더해 흐물흐물 살다, 이런 꼴을 당하니 어떻게 헐 지를 모르고 허겁지겁 당황만 하고 있는 거지요. 실물경제에 능통한 그 친구가 아주 부러운 저녁이었습니다.
반찬들도 왜 그렇게 맛깔스러운지요. 우리 ‘라도’친구들 입맛 까다롭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또 세미-식도락가입니다. 황석어젓갈을 직접 담갔다는군요. 꽈리고추와 함께 볶은 멸치, 취나물, 김치, 파래생채, 막 삶은 양념꼬막등 시장이 반찬이어서가 아니고 정말 맛있었습니다. 3인이 칭찬을 해대니 친구는 좋아 싱글벙글입니다. 딱 하나, 컨셉에 맞지 않은 반찬 하나를 짚어줬습니다. ‘느타리버섯에 소시지‘는 어쩐지 식당의 질(質)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 동생이 훈수를 놓았습니다.
어쨌거나 대만족이었지요. 배가 금세 불뚝해졌습니다. 게다가 모처럼 왔다고 계산을 안하려고 합니다. 이것 참! 반찬 하나 컨설팅해주었다고? 아니 무슨무슨 일기를 읽은 독서료라고 할까요? 하여간 참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친구입니다. 나중, 먼 훗날에 그 친구 일대기를 써주겠다느니마느니 티격태격도 했지요. 추천할 만한 집입니다. 경부고속도로 타다 길이 막히거나 시장기가 들면 주저없이 기흥IC로 들어서세요. 제 얘기만 해도 서비스 한 두가지는 나오겠지요. 그 바로 앞이 골프장입니다. 연예인들이 많이 온다는군요. 옥호는 전주한국관입니다. 음식점 경력이 족히 30여년은 될 겁니다. 저의 경력은 신문편집과 홍보입니다. 전주한국관도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고 맛집 신문기사에 방송에도 뜨고 홍보를 하면 어디 덧날까요? 그럼 홍보부장 자리 하나는 만들어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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