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10년쯤 위에 분들하고 얘기를 해야 호흡이 잘 맞다는 생각을 곧잘 한다. 이분들하고 얘기를 하다보면 참 재미있다, 배울 점이 많다, 느끼는 것도 많다. 그분들은 나를 막내동생쯤으로 여기겠지만 정말 아껴주는 것같다.
어제도 그랬다. 44년생이니까 올해 환갑이다. 우리들의 호칭은 아주 심플하다. 그냥 ‘선배’면 만사 오케이다. 70이 돼도 한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다. 해병대같이.
이 양반이 자기하고 20년된 친구에게 내 취직을 부탁했다.
‘사실 내가 이 친구의 팬이네. 자네가 꼭 자리 알아봐주소. 실력도 있고 아주 인간성이 무던한 놈이라네. 내가 언제 이런 부탁하던가’ 어디 요즘같은 세상에 후배의 취직 부탁하면서 이렇게 추천하기가 쉬운 일인가.
그 말을 들은 나는 정말 감사 천만, 행복했다. ‘아, 내가 세상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나를 알아주는 저런 老선배가 계시는구나’ 그래서 전화했다. 제가 술 한잔 사겠노라고. 그런데 판이 자꾸 커진다. 한 사람 합류할 때마다 차수를 옮기다보니 어느새 4차. 아, 또 필름이 끊어졌다.
선배들 앞에서 실수는 안했을 테지만, 어떻게 찢어졌는지, 이 아침 너무 걱정된다. 그리고 몹시 창피하다. 나이도 제일 어린 놈이 술 몇잔에 해롱해롱하다 그 양반들이 잡아준 택시를 탔으리라. 부끄러운 아침,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아침. 최근 몇 주간 고마운 어르신들이 떠오른다.
전임 사장이었다. 45년생. 이름도 영문 이니셜 略字 KTM으로 부르라던 아주 ‘민주화’된 인사였다. 하기야 미국에서 17년을 살고 박사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GE라는 회사에서 Director를 지냈으니까. 한 직장에서 5년이상 재직하면 무능한 사람으로 찍힌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D일보에서 인터넷신문 초창기 3년동안 고락을 같이 했다. 어찌나 코드가 안맞던지 나는 늘 대들기만 했다. 신문의 시옷 字도 모르는 분이라고 한껏 경멸을 했다. 그때 50여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내가 ‘넘버 2’였다. IMF를 같이 겪으며 구조조정을 하는데 나보고 직원들을 짜르라고 해, 차라리 나를 짜르라고 웨장을 치기도 했다.
그 분이 그만 둔 후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한번 만나보니 사람이 달리 보였다. 그 이후 1년에 한 두 차례 만나뵙거나 안부전화를 하는데 온통 내 걱정이다. 잘 지내느냐, 건강은 어떴느냐, 하는 일은 재미있나, 아이들은 학교 잘 다니고? 원래 이렇게 다정다감한 분이었나 싶다. 같이 일할 때는 사장과 부장으로 티격태격만 하고 서로 미워, 못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이런 법도 있나 싶을 정도다.
후배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 아니, 그 분하고 어떻게 친할 수가 있어요? “쟈사, 오래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어” 하여튼, 요새 그 양반이 나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느닷없이 잘 다니고 비전있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벌써 5개월째 놀고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밥 한 끼 사달라는 전화에 반색이다. 무조건 최부장이 좋아하는 걸로 하잔다. 회가 먹고 싶었다. 상당기간 제대로 된 회를 안먹어본 것 같았다. 오이소주에 모듬회, 금방 10만원이다. 술 한잔 더 사겠단다. 스카치블루 한 병에 11만원이다. 단 둘이 폭탄주를 만들어 먹은 게 지난주이다. 느닷없이 용돈쓰라고 수표를 준다. 황망하게 거절해도 소용이 없다. 그 정이 너무 고마웠다. 벤처기업 회장이다.
지난 토요일, 학교 있을 때 인터뷰로 알게 된 어르신이 있다. 29년생이니 올해 76이다. 대선배다. 이 어르신이 점심을 하잰다. 모처럼 보쌈정식에 점심을 맛있게 먹었는데, 일요일 식구들하고 외식이나 하라고 빳빳한 신권으로 10만원을 주신다.
이것 참! 원고지 30장분량으로 그 분과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기사를 써 웹진에 올린 일로 인연을 맺고 됐는데, 만날 때마다 극진한 환대다. 학교를 그만 뒀다는 말에 낙심천만, 야단까지 했지만, 와이프에 명품 스카프까지 선물한 정도로 세련된 분이다.
옛날 빅히트를 친 ‘보리텐’ ‘아침햇살’ 원료를 만든 분이다. 이제는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젊은 때 당신이 창안했던 속기 보급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계신다. 언론에 그 이야기(속기 보급)가 나왔으면 좋겠다며 업무 추진비조로 30만원을 주신다. 조금도 부담갖지 말라며, 안나와도 아무 상관없다며.
아이구, 아내에게 칭찬받을 일 생겼네. 외식하라고 10만원, 업무추진비에서 10만원. 선뜻 아내의 손에 안겨주었다. ‘영감 죽고 몇 년 만이냐’는 말도 있지만, 모처럼 가장으로, 남편으로 ‘가오다시‘가 서는 날이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한때 정말 잘 나가시던 어르신이 있다. 문화관광부 차관보에 88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을 지냈다. 신문기자로 13년. 노태우때 체육부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글도 정말 잘 쓰신다.
‘콜드론의 함성’이라는 책을 냈는데 글맛도 대단하고 술술 읽힌다. 북중에서 경기고로, 황등출신.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공부선수이기도 했지만 아주 유망하고 날렵한 운동선수이기도 했다.
얼마나 운동을 좋아했으면 경기고에서 서울대를 못가고 고려대를 갔을까? 위에서 말한 벤처기업 회장님하고 고교때 친구였단다.
대뜸 하는 말이 “아, 그 친구. 정말 운동파고 의리파야”.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파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면 실속이 없다.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는데 나를 아주 총애한다. 그 양반도 내 걱정이 대단하다.
요즘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내시지만, 당신 말을 거절못할 후배에게 나를 추천했단다. 어쨌든 안돼 미안하다는 전화다. 미안하기는요? 그런 말씀 해주신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데요.
유림(儒林)을, 유교(儒敎)를 진정한 인간수양의 이념으로 부흥시켜야 한다며 교육에 헌신하고 있는 노익장 선배가 있다. 36년생이신던가. 나를 당신의 후계자로 삼고자 하신 까닭인지 옆에 두고 쓰고 싶어한다.
오죽하면 중국 곡부의 공자사당과 묘에 참배하는 성지순례까지 끼워주셨다. 그분이 최근 오랜 꿈이던 ‘범국민 예의생활실천운동본부’라는 사단법인을 출범시켰다. NGO, 시민단체다. 나보고 기획실장을 맡으란다.
만날 때마다 밥을 사주며 같이 일을 하자고 한다. 솔직히 말했다. 정말 고마운데요. 아직은 제가 젊어서 그러는지, 피가 뜨거워써 그러는지 세상에 미련이 많습니다. 언젠가는 꼭 돌아오겠습니다.
일요일 북한산 산행을 마치고 귀가한 게 저녁 6시. 학교 있을 때 담당팀장인 선배의 전화다. 방배동 호프집인데 별 일 없으면 나오란다. 활짝 반색이다. 한달에 한번쯤은 안부를 묻는 선배다. 노무현 7년후배, 부산상고 나왔다. 1년5개월 같이 일했다.
내가 우리 팀장을 많이 빛내게 해준 일도 있겠지만, 후배 챙기려는 그 마음이 너무 가상하다. 어떻게 지내냐? 얼굴은 그래도 좋네 하며 술잔이 날랐다. 너무 고맙다. 전북지역만 가면 내 생각이 난단다.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할텐데, 하며 걱정을 함께 해준다. 아르바이트 꺼리를 준다. 그런 것은 일도 아니다. 공짜로 해주리라.
그동안 살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람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이런 어르신네들이 있다. 정말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나같이 부족한 철부지를, 뭐가 예쁘다고 어떤 자리에 끼워주기도 하고, 술도 사주고, 취직자리도 알아봐주고, 같이 걱정해주고 그럴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내가 복이 참 많은 놈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아내는 말한다. “당신은 먼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어” 그런가? 과연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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