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용의 모순성 극복
종교전쟁 후 유럽인의 공존과 생명보전을 위해 잠정협약(modus vivendi)으로 등장한 관용은 후에 자유주의 문화의 관행적 원리가 되었다. 관용 자체가 옳고 바람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피해가 극심하므로 일종의 타협을 한 것이다. 따라서 관용은 처음부터 도덕적 원리가 된 것이 아닌 공멸을 막기 위한 합의의 개념으로서 출발한 것이다.
다문화주의시대에 이르러 관용은 구성원의 가장 중요한 필수 덕목으로 등장한다. 다양성을 보장하는 관용의 덕목이 없으면 다문화주의 시대를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은 중대한 모순적 양상을 띠게 된다. 예컨대 A라는 기독교인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A는 자신의 믿음이 참된 진리라 생각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럼에도 불교도인 B와 이슬람교도인 C의 믿음을 인정하는 것은 모순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믿음이 참된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B와 C의 믿음은 그릇된 믿음이다. 그릇된 믿음임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것은 그릇된 것의 유포를 승인하는 격이다. 이것은 A의 절대적 믿음을 침식하는 것이며 기독교인으로서의 A 자신의 자질을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관용의 모순성이다.
그런데 A가 자신의 믿음을 침식하면서까지 B, C의 믿음을 인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 같아서는 B, C 모두의 믿음을 거부하여 자신의 믿음과 동일하게 만들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설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하여도 확실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그러기에 A는 B와 C를 그냥 놔두는 식으로 바라본다. 결국 A의 관용은 무관심일 뿐이다. 단순히 ‘그런 존재가 있구나’하고 인정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태도는 도덕 원리화 된 관용이 아닌 협약적인 관용에 머물 뿐이다.
관용이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적 원리가 되려면 ‘겸양’(generosity, magnanimity)의 개념이 전제되어야 한다. 겸양의 개념이 없다면 소극적인 무관심 및 방관에 불과할 뿐이다. A 자신의 믿음이 참된 진리라 생각한다면 타종교인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유학의 恕 개념) 그럼으로써 그들과 나는 참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론이 다를 뿐이지 참 진리를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각 하에서 A는 B와 C의 믿음의 내용과 진리탐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나와 다르다’는 피상적 이해로 말미암아 ‘그냥 내버려 둔다’는 식의 무관심적 관용이 아닌 ‘과연 나와 무엇이 다른가’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다가가는 능동적 관용이다. 그럼으로써 A는 자신의 믿음을 보다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물론 독단적인 생각이 아닌 내 믿음이 귀한만큼 타인의 믿음도 역시 소중하다는 겸양 의식 역시 보다 공고해진다. 이런 의미라면 ‘관용=절대적 믿음의 침식’이란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믿음을 더욱 심화ㆍ풍부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할 수 있음에도 이러한 기본적 관용의 태도조차 인정 않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 자체에도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도 생명력을 갖기 힘들 것이다.
무관심으로서의 관용은 잠정협약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놔둔다’는 식의 관용은 관용의 가면을 쓴 무관심과 배척일 뿐이다. 도덕의식으로서 관용이 되려면 겸양의 덕목이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나와 무엇이 다른가를 살피고 내 생각에 잘못된 것이 없는가를 살피며 너와 내 생각의 조화로운 발전을 모색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다문화시대에 있어 필요한 관용의 덕목이다. 단순한 ‘다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협약적 성질의 관용은 모순성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관용으로써 현대 사회의 도덕 원리를 도출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개인ㆍ집단의 무분별한 방종을 야기할 뿐이다. 고결성을 가지지 못한 주체를 경계하는 방법으로서도 겸양에 기반 한 관용의 의미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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