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정월 대보름, 활활 타오르던 망우리의 추억
앞산에 둥그런 달이 막 떠오르면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달이 떴다!”고 소리를 친다. 그 소리에 맞춰 동네 앞 논에다 만들어놓은 ‘달집‘ 에 불을 붙인다. 생소나무를 쳐 삼각형으로 집을 만든 후 그 속엔 짚다발을 채곡채곡 채워넣은 달집은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하다. 생솔가지 타는 냄새와 소리가 어찌 그리 정겨웠던지. 치-이-익, 치지직, 불꽃들도 예뼜다. 달집을 빙 둘러싼 사람들이 그때서야 일제히 “망우리야-”하며 손을 번쩍 올렸다.
망우리. 지금 생각해보면 ‘망월’(望月:달 바라기)에서 유래되었을 것같다. 한 해를 시작하며 첫 보름달을 바라보며 한 해의 소원을 빌었을 터이다. ‘혼불’ 거멍골의 떠꺼머리 노총각 춘복이도 천민의 멍에를 벗고자 정월 대보름날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제 피를 이은 아들 하나, 언감생심 양반집 귀한 딸 강실이가 낳게 해달라고. “망우리야-” “망우리야” 흩뿌려지는 달빛을 마시며 얼번이나 심호흡을 했을 것인가.
정월 대보름, 도시에서야 부럼을 먹는다고 수선을 피지만, 촌에서는 부럼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대보름날 생각하면 망우리에 불 지르고 그 잉걸을 구멍 숭숭 뚫린 깡통에 담아 홰홰 돌리며 앞동네 친구들과 떼싸움을 한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부럼을 먹는 습관이 몸에 배이지 않았다. 도시친구들이야 부럼(땅콩, 호도)을 깨물어야 일년내내 부스럼이나 종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수선을 떨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믿지도 않는다. 그들은 정녕 자연스럽게 달구경 하나 못하면서.
보름이 되면 동네에서 스무살이 약간 안된 청년들이 집짓기 좋은 소나무를 자르러 산으로 간다. 그보다 어린 그룹(중학생 또래)은 집집마다 돌며 짚다발을 추렴한다. 부잣집은 다섯 다발, 중농은 세 다발, 못사는 집은 한 다발, 뭐 이런 식이다. 그렇게 모인 짚다발은 어둑어둑해지면 논에 산더미처럼 쌓인다. 청년 형들이 쌓아놓은 삼각형 나뭇가지 집속에 다발째 던진다. 넣어야 하는 게 또 하나 있다. 겨우내 동산에서 신나게 날렸던 방패연, 가오리연, 연이란 연은 다 태워야 한다. 아까워 뒤안에 숨겨놓으면 부모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진다. 마루밑에 숨겨놓은 것도 찾아 달집으로 던진다. 어매 아까운 거! 해가 지나 집에 연이 있으면 재수가 없다던가.
우리는 그저 재재거리며 깡통돌리는 재미에 밤 12시를 훌쩍 넘기곤 했다. 새벽녘 코끝은 하나같이 꺼스럼으로 시커멓다. 은폐 엄폐할 필요가 없다. 동네앞에 전라선 철로가 있었다. 레일을 받치고 있는 침목이 오래되어 썩음썩음한 게 많았다. 그게 우리들의 ‘밥’이다. 어른들 몰래 악착같이 뜯어내 손바닥만하게 잘라 깡통에 넣으면 화력이 가장 세고 또 오래 간다. 기름에 오랫동안 쩔어 있으니 안그러겠는가. 냇물 건너 앞동네 친구들은 침목을 마음대로 구하지 못하니 일단 싸움에서 질 수 밖에 없다. 컨텐츠가 왕이다. 우리는 ‘와아’하니 냇물 너머까지 진출하는데, 그들은 냇물을 넘어선 적이 없다. 매년 지면서도 내년 오늘을 또 벼른다.
이 날은 어른들도 쥐불놓이를 슬며시 허용해준다. 논두렁의 풀들을 태워야 그해 농사짓는데 벌레 피해가 적다는 것이 이유이다. 마루턱에 앉아 싱건지에 삶은 감자나 고구마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달의 밝기에 따라, 겨우내 눈이 얼마나 내렸는가에 따라 한해 농사를 점친다. “올해는 잘 될 거여” “옆집 조새환하고 더는 물쌈 안히야것어. 잘못허면 의 상하것어” “그리요. 지발도. 나도 맘이 쪼매쪼매헌당개로” “허어, 그려, 그려” “불구경이나 나가보세” “동네사람들 만나 덕담도 나눠야제”
보름날 아침 동네 개구쟁이들, 눈 뜨기가 무섭게 골목을 내지른다.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대답을 안하면 어쩔 수 없는데, 대답을 하면 바로 “니 더우, 내 더우, 맡더우”한다. ‘올 여름 너의 더위와 나의 더위를 다 맡아라‘라는 뜻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깜빡 잊고 대답을 해버리면 낭패다. 순진한 친구는 올 여름 더위나기에 벌써부터 걱정이다.
부엌에선 어머니는 찰밥이나 오곡밥에다 나물 묻히기에 한창이다. 겨우내 말린 호박오가리, 고사릿대, 고구마줄기, 토란줄기 등을 전날부터 물에 불린다. 토란대는 잘 삶아도 입안을 약간 까실까실하게 한다. 이 땅 어머니들의 지혜는 정말 못말린다. 신새벽 부엌 벽에 모셔놓은 정안수에 대고 계속 손바닥을 비빈다. 당신 새끼들 무병장수 빌기에 바쁘다. 깨 갈아 끓인 토란국을 먹어 보았는가. 애기 부랄만한 토란알(큰 것은 어른만한 것도 있다)을 입에 넣고 혀로 홰홰 굴려보라. 그 ‘강그런’ 맛이라니? ‘강그럽다’는 ‘감칠맛 나다’라고 번역해야 하나. '소프트하다'고 해야 하나. 번역이 불가능한 우리말들이 있다. 나는 그런 말들이 좋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오늘을 위하여 지난 가실(가을)부터 준비해왔다. 배우지도 못한 분들이 얼마나 현명하고 앞날을 내다보는가. 그러나 지금은 파파할미가 되어 대 이을 ‘젊은 엄마’들이 없다. 그들은 나이가 사십이 넘어도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글 줄 모른다. 청국장을 띄우는 것은 아예 ‘앗 뜨거라’라 한다. 그리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과연 웅숭깊은 음식맛을 낼 줄 아는 이 몇이나 있을까. 음식은 자고로 ‘갱미’가 있어야 한다. 갱미는 更味(맛을 더하는 것)인가? 갱미는 맛의 뒷자락, 이른바 뒷맛이다. 그래도 나는 천만다행이다. 대보름을 챙길 줄 알고 팥을 삶는 40대 중반의 아내가 있다. 작은 아들은 토란국을 먹어보라는 말에 “또 또, 혀를 홰홰 돌려보라고 그러지”하며 싱긋 웃는다.
그렇게 풍성했던 정월 대보름이 도시에서는 가난하다. 가난해도 너무 가난하다. 나는 그런 빈약함이 싫다. 베란다에 매어놓은(이것도 순전히 늙은 어머니 덕분이다) 실가리를 몇 줌 뽑아 싱크대에 올려논다. 된장 많이 풀어 실가리국을 끓여달라는 무언의 시위다. 그저 신문이나 방송에 어디어디에서 연출용으로 하는 쥐불놓이 사진 한 장 실으면 그만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오늘이 무엇을 비는 날인지조차 모르고, 왜 달마중을 나가야 하는 지도 모르고(예전엔 애기는 물론이고 검둥개까지 달마중을 했다) 그냥 보내고 만다.
정월 대보름기념 아내하고 다정히 손잡고‘왕의 남자’나 보러 갈거나, 아니면 ‘왕의 여자’나 보러 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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