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코리안 맘과 ‘워드 열풍’
새벽 6시. 거실을 뒤흔드는 전화벨소리다. 이건 무조건 고향發이다. 아니나다를까 어김없이 어머니 목소리다. “아가(60이 다 되는 큰형한테도 무조건 ‘아가’다. 사실 아가가 자라서 어른이 되지만 한번 자식은 영원한 자식이니 호칭이 이상할 것은 없다), 어지끄 너그 아부지가 너그 큰놈 등록금 보태라고 100만원 보냈다. 글고 눈이 너무 많이 옹개 차 갖고 가지말고 조심히라잉”
전북 임실은 ‘눈 나라’이다. 어젯밤 30cm가 내렸다한다. 전국에서 제일 많이 내렸다. 눈 덮인 내 고향 풍경이 떠오르자 금세 눈이 삼삼해진다. 해마다 신문 1면 톱사진을 장식할 정도로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다. 도대체 얼마나 내렸을까. 연말 눈구경차 다녀왔음에도 당장이라도 불쑥 가보고 싶다. 쏟아지는 눈을 대책없이 맞으며 어릴적 지게 지고 땔나무하던 산속을 헤매고 싶다. 운좋으면 노루하고도 마주칠 것이다. 목노놓아 잡은 토끼고기는 또 얼마나 맛 있었던가. 사는 게 맨날 맘뿐이고 몸은 여기 있고, 진짜 재미 하나도 없이 산다.
그나저나 맥없는 상상을 접고 조간신문을 펼친다. 2면 제목이 확 눈에 들어온다. “아들 오면 갈비-콩나무무침, 어묵 볶음을 실컷 해줄 거예요” 미국에서 조용히 불고 있는 ‘하인스 워드 열풍’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어머니, 한국인 김영희(55)씨의 인터뷰기사다. 콩나물무침이라니, 어묵볶음이라니? 그것도 미국에서. 얼굴색 다른 모자가 밥상머리에 앉아 우리 음식을 먹는 풍경이 떠오른다. 아하, 그래서 워드 핏속에 우리들의 피가 단단히 뭉쳐 있었는 모양이구나. 어머니는 자식 음식 먹이는 데는 소질을 타고 나는 모양이다. 자식을 오직 잘 먹일 수만 있다면 어떤 고생을 마다할 것인가.
그 어머니, 60-70년대 주한 미군기지에서, 이른바 '양공주'였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가난때문에 배우지도 못했다고 한다. 흑인남성을 만나 애를 낳고 미국에서 곧 버림을 받고 냉대와 차별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인가. 그런데도 그는 아들에게 '한국'을 심어주고 건실하게 성장토록 가르쳤다. 그 아들, 그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어디 워드가 아내와 아들 이야기를 하던가. 입만 열면 어머니를 말했다고 한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 아닌가. 이런 휴먼 스토리는 매스컴에서 마땅히 대서특필돼야 할 일이다. 단지 선정성만 경계한다면 말이다.
'목근통신'으로 유명한 김소운이라는 수필가가 있었다. 어머니가 문둥이일지라도 입맞추겠다며 하염없이 어머니와 조국을 노래했었다. 그렇다. 문둥이라고 어머니가 아니겠는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예전에 왜 3년 시묘을 했는지 아는가. 낳아 걸음마를 하고 겨우 사람구실할 정도의 시간이 3살은 넘어야 한다고 하여 그때까지 보살펴준 부모님의 은혜를 그린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공자가 직접 언급한 한민족의 기본예의였다. 조선조에도 그랬다. 부모님이 살인죄를 저지르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무릇 사람의 아들이라면 그 부모님을 업고 깊은 산속이나 무인도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말아톤' 주인공의 어머니를 보라. 장애자를 둔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의 '인간 승리'를 보라. 우리 주변에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그들의 눈에는 불구자식도 예쁘기만 할 터.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영원히 위대하다. 어머니야말로 '위대함, 그 자체'가 아닌가.
그녀는 낯선 외국에서 남자에게 버림받고 피부색 다른 혼혈아를 남몰래 눈물을 감추며 그렇게 키웠을 것이다. 그러니 “엄마는 나의 모든 것(everything)"이라고 하지 않은가. 스포츠는 젬병이어서 슈퍼볼 MVP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딸 피를 타고 난 ‘검은 청년’의 미소를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무엇이 미국인들을 감동케 하는가. 첫째는 위드라는 청년의 겸손하고 솔직한 자세 때문인 듯 하다. 둘째는 그 이면에 ‘한국인 어머니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인 것같다. 언론들의 장난은 언제나 지나치다. 미키마우스를 보고 웃어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어디 만들 말이 없어 '살인미소'라고 할까? 살인미소? 그는 어릴 적부터 미키마우스를 좋아했다고 한다. 언제나 웃으므로. 그런 그가 맨먼저 디지닐랜드를 방문하여 미키마우스 옆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어머니의 힘? 어머니의 존재? 어머니의 사랑? 에 대해 새삼 숙연해졌다. 그 어머니의 전화상 멘트를 들어보자. “가슴이 떨려서 경기장에는 못갔어요. 아이가 집으로 전화로 ‘엄마, 우리 팀이 우승했어’라고 하더군요. MVP 받은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다 큰 놈을 역시 ‘아이’라고 한다. “아이한테 겸손하면서도 자부심을 가지라고 늘 얘기했어요” 그렇다. 그 친구가 “엄마가 챔피언”이라고 말하게 된 데는 이런 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른쪽 팔뚝에 한글로 새긴 너무나 뚜렷한 제 이름을 보라. ‘하인스 워드’. 어찌 한민족의 피를 타고난 우리로서 가슴이 뭉클하지 않겠는가.
몇 해전 어머니를 찾아온 미국인 청년이 떠올랐다.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으면 등에 커다란 글씨로 ‘엄 마/아 들’이라는 한글문신을 새겼을까. 그 문신을 보고 섬뜩했던 기억이 났다. 그 친구는 결국 어머니를 만나보지 못하고 떠났다던가. 어머니의 무엇이 그리 그리워서 목말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어머니들은 눈 감고 죽을 때까지 자식사랑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생각의 말미에 또 나의 어머니가 떠오른다. 음료수라면 콜라도 못드시는 분이 ‘도대체 자식인생 작살내는 술이 머간디 그러냐. 나도 술맛 좀 보자’며 독한 양주 한 잔을 스트레이트로 마시더니 그 자리에서 실신하신 적이 있다. 만약 그때 일어나지 못하셨다면 나의 천추에 씻지 못할 불효는 어디에다 갚았을 것인가.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할 일이다. 그것을 어느 누가 ‘동물적 사랑’이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동물적 사랑이면 어떤가? 그게 원초적 본능인 것을. 불난 현장에 자식 구하러 무모하게 뛰어드는 건 어머니 말고 누가 있을까. 그런데도 술을 끊지 못하고 계속 근심걱정만 끼쳐드리는 내가 어찌 ‘어머니의 아들’일 것인가. 나무아미타불!
어머니처럼 친했던 장모. 거리를 다닐 때에도 어머니, 어머니하며 손잡고 다녔다. 아내 생일때마다 출근길 집앞 공중전화에서 “오늘 이사람 생일이예요. 고맙습니다“라고 전화를 했었다. 그 분이 돌아가신 해, 아내 생일에 습관적으로 공중전화를 찾았는데, 이제는 다시 전화할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몸서리를 친 적이 있다. 평생을 흙만 파고 소 돼지를 키우고 누에를 치고, 농촌에서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궂은 일만 하신 77살의 어머니. 칠남매를 낳고 기르고 가르쳤다. 그 어머니, 이제 사시면 몇 년이나 사실까. 1년에 잘 하면 4번 만나 뵈므로, 5년을 더 사신다면 20번을 뵐 것이다. 앞으로 20번밖에? 그리고 끝이단 말이지. 어허! 사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돌아가시면 아무 때나 불쑥불쑥 전화하여 듣는 목소리, 죽어도 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편지는 대체 어디로 배달할 것인가? 그때는 손이 허전하여, 마음이 가난하여 어떻게 살까. 그 생각만 해도 눈물이 줄줄줄 흘러버리는데, 노래방에 가서 어떻게 ‘사모곡’이나 ‘칠갑산’을 울면서 불러대며 분위기를 깰 것인가.
그런 어머니한테 무엇을 못해드린단 말인가. 아무리 싫어도 어떤 비위를 못맞춰 드린단 말인가. 색동옷 입고 재롱은 못 피울까. 돌아가신 후 불효를 뉘우친들, 대저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인스 워드는 알고 있을까? ‘진정한 챔피언’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까. 그 놈 참 기특하구나. 미키 마우스를 옆에 두고 퍼레이드를 벌이며 허벌나게 웃고 있는 그 놈이, 나도 이렇게 예쁜데, 온갖 상처를 받으며 곱게 키운 그 어머니는 얼마나 자식이 대견스러울까. 이것이 한국 어머니의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의 딸들은 억척스런 또순이도 되면서 신사임당같은 현모양처도 되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코리안 맘’의 명성을 드날리고 있구나.
자랑스러울손! 한국의 딸들이여! 죽어도 자식을 품에 안을 엄마들이여!
겉으로만 멀쩡한 이 땅의 자식들이여! 부모 살아 계실제 섬기기를 다할 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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