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천단강성)의 ‘설국’(雪國)이라는 작품은 이렇게 시작된 것을 기억한다.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이윽고 눈나라였다”. 그랬다. 내 고향 임실 오수를 찾아가는 것은 부모님은 어떻게 ‘눈 집’에서 사시는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설국’에서 나오는 것처럼 ‘눈 나라’를 보고?은 마음에서였다.
무궁화호가 논산을 넘어 익산을 지나치자 만경평야의 ‘눈천지’가 철없는 나의 눈을 자못 즐겁게 했다. 충청, 호남에 66년만에 내렸다는 폭설. 교통이 마비되고 비닐하우스는 말할 것도 없고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깔려 죽는 사태가 일어났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선 차량 1000여대가 갇혀 날을 새우고. “오래 살다보니 이런 기상이변도 보고 참 벨일도 쌨다”는 게 우리 아버지 특유의 표현이었다. 벌써 10여일이 지나지만 그새 녹은 게 저 정도라니, 얼마나 많이 왔을까.
나같은 ‘푼수’는 그저 “와, 그때 눈내리는 광경은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그때 이 자리에 있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나 할 밖에. 기차가 남으로 남으로 내려갈수록 눈은 더 많다. 산도 논도 밭도 지붕위에서도 아직 녹지 않아 켜켜이 쌓인 눈이 투명한 햇빛에 거울처럼 반짝거렸다. 어머니는 “눈이 쌓여 녹질 않아 색경(거울)처럼 번질번질허다”고 연신 말하며, 다 큰 자석놈 낙상만 걱정해댔다.
소설의 구절처럼 열차는 이윽고 오수역에 도착했다. 오후 2시30분, 전날 숙취탓에 속은 완전히 홍어속이다. 읍내까지는 1km정도. 교통수단이 없으니 두다리가 최고다. 아무 음식점이나 들어가도 뜨끈뜨끈한 국밥 한그릇 돈 없어도 말아줄 처럼 줄지어 서있다. 지금도 5일장이 열리는 곳, 의로운 충견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개 오(獒)자에 나무 수(樹). 고려 중기때였다던가. 술 취해 하천 언덕배기에 잠이 든 주인을 위해 몸에 물을 묻혀 불을 끄고 개는 죽었다던가. 주인이 갖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위로해주었는데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의견제를 지내고 소재지에선 보신탕을 먹지 않은 전통을 지켜왔는데, 최근에는 '오수 신포집'이라고 중심에서 버젓이 장사를 하고 있다. 서울에서도 먹으러 온다던가. 한적한 면소재지일망정 군소재지(임실)보다 장 규모가 더 큰 교통의 요지이다. 대수리탕(6000원)을 훌훌 비워내니 해장도 되고 속이 그득하다. 대수리는 표준어로는 다슬기일 게다. 지역마다 이름이 틀리다는데, 충청도에선 올갱이라고 하고 강원도에선 고동이라고 하는데, 요게 아욱에도 된장풀어 국을 끓이면 물이 새파라니 진짜 먹을만하다. 저기 하동에선가 재첩국을 제일로 친다는데, 어디 대수리국에 비할쏘냐.
어릴 적 동네앞 냇가에는 제법 굵직한 대수리가 많았다. 잡기도 쉬워, 금세 한 소쿠리 잡으면 저녁 간식거리로 최고였다. 가는 대꼬챙이로 콕 찔러 살살 잡아댕기면 소라껍질같은 속에서 돌돌돌 말려나오는 대수리. 바늘로도 많이 깠다. 먹고는 싶어 목에서 당그래질을 하지만, 10여개를 모아 바늘에 모아 한몫에 어머니, 여동생들 입에 털어넣어주고자 애써 참았던 기억, 마루에 둘러앉아 대수리 까먹으며 달 보던 추억, 얼마나 행복한 기억인가. 이런 기억 없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가난한 일인가.
부모님에게 곧 죽어도 꺼칠한 모습을 보여 걱정 끼쳐드릴 일은 아니다. 문짝도 삐거덕거리는 시골이발소를 찾았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연탄불에 밤을 구워 까먹고 있다. 쉬어터진 여자면도사도 있다. 대뜸 “앞면도 헐라요?” 묻는다. 불감청고소원. “앞면도도 해줘요?” 자리에 앉자, 초등학교 시절 이발소에서 그랬듯이, 연탄불에 적당히 불은 거품을 턱에 휘휘 바르고 면도기를 가죽에 쓱쓱 문지른다. 오매! 여기는 옛날 고래로네. ‘효자동 이발사’맨키로 영화 나와도 쓰것네. 오늘 홍자 만났네. 싶었다. 어릴 적은 면도기를 보면 얼매나 겁이 나?지. 면도기로 한번 긁어낸 흔적도 여러 쪼각으로 오려논 작은 사각의 신문지이다. 서울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별도의 돈을 주지 않는한 앞면도를 해주지 않는다. 지긋이 눈을 감으며 추억에 잠긴다. 약간은 역하면서도 그렇게 기분은 나쁘지 않은 연탄냄새와 푹푹 끓는 주전자의 수증기. 툰탁한 여면도사의 친절, 오가는 사투리속에 잠이 든다. 그래봤자 7000원이다. 행복한 낮잠이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해산물을 사기 위해서 장에 들어선다. 홍합 2000원, 참꼬막 4000원, 오징어 2마리 3000원, 합쳐봤자 9000원. 갈치 만원에 5마리. 토종닭을 사자. 여기에서는 재미있는 게 바로 그 자리에서 토종이든 양계든 잡아준다. 묵직하다. 빨간 고추 넣고 큰 가마솥에 불태서 고아드시라고 해야겠다. 어머니가 특히 좋아하는 피조개 값을 물어본다. 1만원에 3개, 큰 것 5개에 2만원이다. 사가고는 싶지만 엄청난 값에 혼날 게 뻔하다. 워낙 커서 생놈을 까는 것도 거창하다. 그냥 두자. 피조개 피가 사람피에 거의 근접한다고 한다. 막 까서 피는 쭉 들여마시고 속알맹이는 몇 조각 나눠 생쏘주 먹기에도 아까운 귀물이다. 주인집 아줌마는 연방 이건 북한산 아니어서 쬐금 비싸요. 좀 사가시오. 하는데 발길을 돌리다.
5km쯤 되는데 택시비는 5000원이다. 서울서 오수까지 무궁화호 삯이 16200원인데, 택시비가 너무 아깝지만 할 수 없다. 2시간여만에 한 대씩 오는 군내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문제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1km는 족히 걸러야 한다. 눈으로 뒤범벅된 동네 초입을 택시로 들어서면서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거린다. 어떻게 저런 ‘눈 집’에서 살고 계실까. 마을회관 앞에 꾸부정한 노인이 걷는데, 아무래도 영락 아버지 같다. 후딱 문을 열고 큰소리로 부르니 돌아서는데 맞다. 깜짝 놀라신다. 아침에도 멀쩡히 안부 묻는 전화를 해놓고 도둑처럼 나타났으니 그럴밖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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