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읽는 社報칼럼/200603]연인들 ‘기념일’로 넘치는 나라
로이터통신이 최근 한국의 달력은 ‘연인 기념일’로 넘쳐나고 있으며, 심한 경우 기념일에 선물을 챙기지 못하여 ‘찢어지는’(헤어지는) 커플도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서울발로 전세계에 타전했다고 한다. 기사를 본 순간 ‘앗 뜨거’라는 심정과 함께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약간은 ‘고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인가.
1월14일은 연인에게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다이어리데이, 2월14일은 밸런타인데이,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 4월 14일은 연인이 없는 남녀가 만나 자장면 등을 먹는 블랙데이, 옐로데이-로즈데이(5월), 은으로 만든 제품을 교환하는 실버데이(7월), 연인들이 초록색 옷을 입고 숲을 거니는 그린데이(8월), 와인데이(10월), 가늘고 긴 과자를 교환하는 빼빼로데이(11월11일) 등의 기념일을 열거하면서, 이외에도 한국에서는 특이한 현상으로 첫 만남 또는 첫 데이트 이후 날짜수에 따라 100일, 200일, 300일, 1000일을 기념하고 있다고 전했다.
*매달 14일은 ‘무슨무슨’ 데이…애정도 마케팅化*
이런 날들이 1년에 21일이나 된다니, 돈없는 젊은이들은 어디 겁이 나서 여친(여자친구)나 애인을 사귀기나 하겠는가. 그래서 “한국에서 사랑은 막대한 비용과 함께 온다”는 말이 횡행할 정도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각 기업들의 ‘애정의 마케팅화’가 한몫한 것이 사실이지만, 젊은이들 사이에 이메일이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보편화(실제론 24시간 생활화이다)된 데에도 원인이 있겠다. 이들은 식사중이거나 강의중일 때, 심지어 잘 때에도 잠시도 손을 쉬지 않는다.
또한 하루라도 만나지 못하면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인 모양이다. 그러니 물질적으로 주고받는 희한한 풍토가 생겼으리라. 얼마나 ‘역사’를 창조할만한 기념일이라고 100일, 200일을 헤면서 챙길까. 어떨 땐 이들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로이터통신 기사의 전체 톤이 한국의 이러한 풍조를 약간 비아냥대는 듯 했다. 과중한 기념일로 인한 부작용을 지적하면서 용돈을 받아 남친(남자친구)에게 선물을 주다가 결국은 선물 비용 때문에 헤어진 사례를 든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필자는 몇 년 전 일간지 독자칼럼에 국가차원으로‘처용의 날’을 정해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자는 의견을 내놓은 적이 있다. '처용의 날'이 생뚱맞은가? 처용설화를 각색, 기존 울산지역에서 실행하고 있는 ‘처용문화제’를 확대하여 전국민이 흔연히 어울릴 수 있는 ‘처용의 날’을 만들자는 것이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독특한 처용가면이나 얼굴표정이 100여개나 된다는 하회탈을 하나씩 둘러쓰고 춤을 덩실덩실 추며 신라 천년 세월속에 피어난 처용가를 부르면서 아파트단지나 마을을 한바퀴씩 도는 날로 정하면 어떨까.
*’처용의 날‘ 정해 전국민 축제한마당 삼았으면 *
<서라벌 밝은 달빛에 취해 밤늦게 노닐다가/집에 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네 개로다/둘은 내 것이지만 나머지 둘은 누구의 것인고/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내 어찌 하리오>
상상만 해도 너무나 에로틱한 풍경이지 않은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는 연민과 관용의 마음이 스며들어 있지 않은가. 성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성매매가 난무하는 혼탁한 이 사회에 던지는 경종의 의미도 있지 않을까. 제웅(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처럼 처용가면을 만들어 둘러쓰고 지역적으로 날짜를 정해 한바탕 마당놀이라고 벌이면 어떨까. 자못 해학적이지 않겠는가.
미국의 어린이들이 매년 10월의 마지막날에 한다는 귀신놀이 '핼로윈 데이'(Halloween Day)가 국내에 상륙한 지 오래라고 한다. 경기가 불황인 데도 핼러윈 아이템 매출은 갈수록 늘고, 백화점 등에서 영화 ‘스크림’에 나온 해골가면이나 해리포터 캐릭터, 사탕, 야한 파티복등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몇 년전부터 강남지역 유치원에 이어 직장인 세계까지 번지고 있다.
핼로윈 데이는 원래 고대 켈트족이 매년 10월 31일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동물 등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에서 유래됐다. 대표적인 풍습으로 핼러윈 당일 저녁 유령 마귀 요정 등으로 가장한 아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트릭 또는 트리트(Trick or Treat)'라고 외치면 어른들이 사탕을 집어주거나, 죽은 자들의 길을 밝혀준다는 호박등(Jack O'Lantern)을 켜둔다고 한다.
유래가 서양이고 기념일이 10여개가 된들 무슨 상관이며 좋아하는 계층이 있으면 되고,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 사실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이런 추세로 보면 그럴 리야 없겠지만,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조차 그들의 미풍양속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 대체되지 않을까 심히 두렵다. 그래서 칠면조 고기 한번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왕따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심심찮게 영어공용화문제가 논란이 되는 나라가 아닌가.
*‘토종’ 기념일 많이 발굴 제정했으면*
필자는 할로윈데이 자체에 대하여 좋고 싫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서양풍속을 받아들인대도 그 유래의 뜻을 새기며 일회성이나 물질적으로만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이런 축제를 우리처럼 ‘별난 계층’의 전유물로 생각지 않으며, 결코 사치한 복장과 비싼 가면으로 위화감을 조장하지 않고 동네축제형태로 즐긴다고 한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그들의 풍속을 흉내내지 않고 우리 전래의 민속을 현대에 맞게 재현하는 것일 것이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도 그날 맨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을 부른 후 상대방이 대답을 하면 ‘네(니) 더위 내 더위 맡더위’(너와 나의 더위를 네가 떠맡아라)라고 말하고 달아나는 앙징맞은(?) 풍습이 있었다.
우리도 ‘처용의 날’에 ‘Trick or Treat' 대신 상큼한 구호 하나 만들어 부르면 어떨까.
무슨 무슨 데이는 젊은이들의 기념일이 마땅히 없는 마당에 초콜릿이나 장미, 와인을 팔려고 하는 상술과 맞아떨어져 정착된 것으로 치자. 하지만 거기에 핼로윈 데이까지 가세해 춤을 추는 등 법석을 떨어야 하는 것일까.
기념일의 토착화, 전통화는 필요한 일이다. 천박한 상업주의에 휩쓸려 어느 특정세대에만 유행하는 기념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농협에서는 3월3일은 삼겹살데이, 5월5일은 오리고기 먹는 날 등으로 정해 대국민 홍보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농산물 살리기 차원에서도 듣기 좋은 소식이다. 세대, 계층, 지역을 막론하고 전국민이 흥겹게 어울리고 즐기는 있는 ‘토종’ 기념일을 많이 발굴하여 널리 알리면 어떨까.
객쩍은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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