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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학술 기조강연) 선비(유림)정신의 현대적 조명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05년 11월 10일 09시 38분 38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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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6_학술자료집_기조강연_신봉승.hwp [43 KBy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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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識人 노릇하기 참으로 어려워라
- 선비정신의 새로운 조명 -
辛 奉 承
劇作家■大韓民國藝術院 會員
1.
梅泉 黃玹 선생이 남긴 絶命詩의 마지막 구절인 <지식인 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네 : 難作人間識字人>를 제 발제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선비가 무엇이며, 선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제 짧은 식견으로는 다른 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비가 卓上空論의 대명사이며, 無爲徒食을 일삼으며, 마침내 政爭으로 소일하면서 政派의 이해에 매달리다가 나라를 망쳐먹은 支配勢力이어서 打倒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비’라는 말 자체를 잘못된 쪽으로 호도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로 있습니다.
조선왕조를 지배한 官僚集團의 구성원을 士大夫라고 합니다. 士大夫란 科擧制度와 朱子學의 精神을 근간으로 무려 4백여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다듬어진 산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官職에 나가있는 선비가 士大夫라면 ‘선비’의 참 뜻을 무엇이겠습니까.
■논어論語■에는 ‘處身에 廉恥가 있으며, 사신이 되어 君命을 욕되게 아니하면 선비랄 수 있다’ 거나, ‘無事泰平을 염두에 두는 선비는 선비 될 자질이 부족하다’ 등 槪念的인 설명으로만 일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더 한심합니다. 한글학회에서 편찬한 ■한글 큰 사전■에는 ‘學識이 있되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선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터무니없어도 분수가 있어야지요. 한국을 대표하는 辭典이 이런 지경이면, 선비에 대한 羨望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북한판 ■조선말대사전■은 그래도 우리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선비의 정의를 ‘① 봉건사회에서 주로 유교 학문을 닦은 양반층 또는 그에 속하는 사람, ② 낡은 사회에서 실천과 떨어져서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선비의 정의까지를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이 답답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꽤나 생각해 본 흔적은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비는 무엇이고, 선비정신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조선시대의 지배구조를 관통하고 있는 性理學은 지식인들에게 ‘知行’을 가장 큰 덕목으로 가르쳤습니다. 물론 ‘知行’이란 배우고 익힌 바를 반드시 실행으로 옮겨야 하는 실천요강이기에 ‘道德的 勇氣’를 수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는 실행하지 않는 高位 官職者보다 실행하는 常民들이 더 존경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道德的 勇氣를 갖추지 못한 선비는 참 선비의 대열에 낄 수가 없었습니다.
朝鮮王朝가 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單一王朝의 기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國家紀綱이 무너지지 않았고, 그것은 ‘行動하는 知識人’들의 표상인 젊은 史官들의 直言하는 勇氣가 歷史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朝鮮王朝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붓은 든 선비가 칼을 든 武班을 다스린 나라입니다. 5백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선비가 군인을 다스렸다는 사실은 世界史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붓을 든 선비가 칼을 든 군인을 지배하면서 5백년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참 선비의 氣槪와 義理가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선비의 기개가 살아있게 되자면 요즘말로 프라이드가 있어야 참 선비노릇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선비의 프라이드는 어렸을 때의 교육에서 싹트게 됩니다.
仁祖 朝의 領議政이었던 申欽(1566～1628년)의 ■士習篇■의 구절은 곱씹어 볼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몸에 역량을 간직하고, 나라에 쓰이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선비다.
선비는 뜻을 숭상하고(尙志), 배움을 돈독히 하며(敦學), 예를 밝히고(明禮), 의리를 붙들며(秉義), 청렴함을 긍지로 여기며(矜廉), 부끄러워 할 줄 안다(善恥). 그러나 세상에는 흔하지 않다.
선비의 자질이 잘 정리된 글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러나 세상에는 흔하지 않다.’라는 대목에 유념해야 합니다. 그 흔하지 않은 선비의 精神은 근원적으로는 家庭에서 다져지게 됩니다. 또 社會에서는 이 같은 家庭에서의 訓導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됩니다.
三判書不如一大司成 : 세 사람의 판서가 한 사람의 대사성에 미치지 못한다.
三政丞不如一大提學 : 세 사람의 정승이 한 사람의 대제학에 미치지 못한다.
十領議政不如一王妃 : 열 사람의 영의정이 한 사람의 왕비에 미치지 못한다.
十王妃不如一山林 : 열 사람의 왕비가 한 사람의 선비에 미치지 못한다.
선비(山林)의 존재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社會의 認識입니다. 기성사회가 가정에서의 교육을 뒷받침하는 바로 이 같은 프라이드가 젊은 선비들에게 道德的 勇氣를 갖추게 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行動하는 知識人’을 양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우리는 통렬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2.
朝鮮의 임금들은 스스로 王道를 세워나가기 위해 經筵을 소중히 했습니다. 경연은 아침, 점심, 저녁에 하였다하여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이라 했습니다.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밤에도 經筵官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정사에 관해서도 토론했습니다. 그러므로 밤에 하는 ‘경연’을 夜對라고 했습니다.
中宗 12년 4월 4일의 朝講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特進官 李自健이 임금의 면전에서 아주 혹독한 直言을 입에 담았습니다.
- 강원도에는 서리가 오고 눈이 내려 보리가 얼어 죽었다하고, 여러 변괴가 나타나고 겹쳐서 끝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성상께서 성심이 지극하지 못하여 그런가 싶습니다.
自然의 災害까지도 임금의 失德에서 기인되었다는 直言입니다.
절대군주인 임금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참 선비입니다. 이것을 요즘말로 설명하면 ‘行動을 수반한 知識人’이 되는 것입니다. 선비가 없다는 것, 行動을 수반한 知識人이 없으면 社會의 紀綱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천박해 집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그날의 朝講에서는 靜菴 趙光祖:1482～1519) 선생의 直言도 있었습니다.
-(전략) 상하가 일체 되어 조정이 和氣에 차야 天災가 해소되는 법입니다. 지금 조정안에 宰相은 옳다하고 臺諫은 그르다 하여, 하나의 시비 속에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反目하여 서로 헐뜯어 위아래가 결리 하게 되니, 신은 災變이 생기는 것을 朝廷의 不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宰相은 아래 동료들 보기를 子弟처럼하고, 아래 관원은 상관 보기를 父兄처럼 하여, 상하의 사이에 꺼리고 숨기는 일이 없이 서로 바로잡고 경계하여 嚴肅하고 和氣靄靄하여진다면, 자연히 君子가 진출하게 되고, 小人은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중종 12년 4월 4일자 실록
480여 년 전에 기록된 내용이지만, 지금의 政府나 政黨 혹은 統治者, 閣僚, 國會議員들에게 들려준다고 해도 나무랄 데 없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하, 밝은 임금은 臺諫의 말을 좋아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지 않으나, 어두운 임금은 자신의 의견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臺諫의 말을 돌보지 않게 마련이옵니다. 지금 臺諫들이 간절히 논계하고 사직한 것은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이 옵니다. 숭상하고 상을 주고 감복하게 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위엄으로 모두 물리쳐 사기를 꺾어 위망의 조짐을 보이시니, 이는 어두운 임금이 하는 일이옵니다. 전하의 聖德과 學問으로 이처럼 극도에 이르실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靜菴 趙光祖 선생이 살아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듯 한 직언을 했다는 점에서, 歷史가 지난 시대의 기록만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脈絡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白沙 李恒福 선생(1556～1618)은 젊어서부터 정의로운 선비로 명성을 떨치었습니다. 光海君 朝의 패덕을 말할 때 廢母殺弟가 가장 큰 악덕으로 거론되곤 합니다. 비록 繼妃이긴 했어도 모후가 분명한 仁穆大妃를 西宮에 유폐하고, 부왕의 적자인 永昌大君을 강화도에 부처하였다가 蒸殺한 일을 ‘폐모살제’라고 합니다. 光海君을 임금의 자리에서 몰아내게 되는 폐모발의는 당대의 권신들인 이이첨, 이경전 등이 주도하지만, 어머니를 버리면 살고, 어머니에게 효도하면 죽이겠다는 이 패덕이 온 조정을 벌집 쑤시듯 술렁거리게 하자, 내로라는 대신들은 병을 핑계하면서 조정을 떠나가고, 장안에 들끓던 유생들도 하나하나 낙향하게 됩니다.
領議政 奇自獻 선생(1562～1624)은 깊은 수렁과도 같은 고뇌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56세의 영의정은 이 패덕을 막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자 합니다.
“폐모를 한다면, 금상은 聖名 대신, 悖德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리라!”
조선의 선비가 걸어야 하는 당당한 길을 가기 위해 奇自獻 선생은 길고도 절절한 箚子를 써 올렸으나, 이미 조정은 백관들을 모아 收議하기로 결정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올린 차자는 가차 없이 불태워지고, 그에게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주청이 빗발치듯 일어납니다.
뒤늦게 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白沙 李恒福 선생은 병석에서 일어나 길고도 절절하게 폐비 반대의 直言上訴를 올리게 됩니다. 이때 白沙 선생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있는 병구의 몸이었습니다.
-신은 올 팔월 초아흐레에 다시 중풍을 얻어 몸은 비록 죽지 않았으나 정신은 이미 탈진된 상태입니다. 직접 뵙지도 못하고 멀리에서 분수에 입각하여 죽음을 결심한지도 지금 거의 반년입니다만 아직 병석에 누어있사옵니다. 공무에 관한 모든 일에 대해서 대답하여 올리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이 문제는 나라의 큰일이오니 남은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병을 핑계로 삼고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겠습니까. 대체 어느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 계책을 세웠사옵니까. 임금께 堯舜의 道가 아니면 진술하지 않는 것이 옛날의 밝은 훈계이옵니다. 순임금은 불행하여 완악(頑惡)한 아비와 사나운 어미가 항상 순임금을 죽이고자 우물을 파게하고는 뚜껑을 덮어 버렸으며, 창고의 지붕을 수리하게 하고 밑에서 불을 질렀으니 그 위급함이 극도에 달했던 것이옵니다. 그럼에도 순은 목 놓아 울면서 자신을 원망할 뿐, 부모에게 옳지 않은 점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어버이가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때문이옵니다. 그러므로 春秋의 의리에는 자식이 부모를 원수로 여기는 법이 없사옵니다. 효도의 중한 것이 어찌 친모나 繼母가 다름이 있겠사옵니까. 지금 효도로써 나라를 다스려 한 나라 안에 점차 교화되어 가는 희망이 있는데, 이러한 말이 어찌하여 전하의 귀에까지 이르게 되었사옵니까. 지금의 도리로서는 순의 덕을 본받아 효도로써 화합하고 지성으로 섬겨, 大妃의 노여움을 돌려서 慈愛로 만들고자 함이 어리석은 臣의 바라는 바이옵니다.
광해군 9년 11월 24일조 ‘실록’
반신불수로 쓸어져 누워있는 白沙 李恒福 선생이 올린 이 上疏文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백관들 사이에는 다시 동요가 일었고, 廢母論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폐모론의 주동자이자 권력의 핵심들은 재빨리 3사의 言官들은 동원하여 奇自獻, 李恒福 등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했습니다. 임금인 光海君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權臣들의 강청을 묵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奇自獻, 李恒福 등 두 元老는 流配刑을 받게 됩니다.
白沙 李恒福 선생의 배소는 홍원에서 창성으로, 다시 三水로 옮겨졌다가 거기서 또다시 北靑으로 변경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白沙 선생은 비틀어 질대로 비틀어진 반신불수의 몸을 이끌고 배소를 향해 떠나갑니다. 그는 忘憂嶺(지금의 망우리 고개)을 넘으면서 양주 쪽을 바라봅니다. 거기에 宣祖의 능침인 穆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廢母가 부당하다 했다 하여 부처되어 가는 몸이면서도 선왕에게는 송구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했을 것입니다.
白沙 李恒福 선생은 鐵嶺을 넘으면서 시조 한 수를 읊었습니다.
철령 높은 재에 지고 가는 저 구름아
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님 게신 구중궁궐에 뿌려 본들 어떠리.
白沙 李恒福 선생은 끝내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配所인 북청 땅에서 세상을 뜨니 향년 63세였습니다. 이미 朝廷의 高位官職을 두루 거치었고, 중풍으로 병들어 있는 몸이라면 구태여 나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누가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白沙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行動하는 知識人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3.
오늘 우리는 成均館 大成殿이라는 古屋을 지나서 超現代式으로 지어진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바로 그 文廟에 우리가 받들어 이어받아야 하고, 우리 靑少年들이 龜鑑을 삼아야 할 열여덟 분의 先賢들의 位牌가 모셔져 있습니다. 하루하루 망각의 건너편으로 살아져 가야할 분들이 아니라, 한 분 한 분 모두가 우리들의 가슴에 소중하게 다시 살아나야 할 ‘行動을 수반했던 知識人’들의 표상입니다.
그분들은 공익을 위한 일이면 자신의 불이익을 기꺼이 감내하였습니다. 그분들은 나라를 위한 일에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였습니다. 또 그분들은 선비의 길을 가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梅泉 黃玹 선생이 <지식인 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려워라>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自盡한 것이 1910년■, 朝鮮王朝가 日帝의 植民地로 전락하는 痛恨의 시기였습니다. 悲劇은 이 때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5년 전인 1905년에 이른바 乙巳勒約이 强制締結되면서 이 땅의 知識人들을 몸서리치게 하였습니다.
1906년, 왜국 땅 對馬島에서 斷食으로 殉國한 勉菴 崔益鉉 선생의 遺骸가 釜山浦로 돌아와 그곳 商務社에 안치됩니다. 勉菴 崔益鉉 선생이 유해가 안치된 商務社의 주위는 통곡으로 조문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新聞, 라디오는 물론 인터넷도 없었던 시대에 어떻게 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와 함께 살아있기에 天下同生이요, 그의 죽음은 세상이 모두 죽은 것이기에 天下同死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遺骸가 모셔진 殯所에 행색이 꾀죄죄한 사팔뜨기 시골 선비 한 사람이 들어와서 輓詞 6수를 영전에 올리고 통곡을 쏟아놓습니다. 그의 행색이 너무도 초라했던 탓에 누구도 이 시골 선비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그가 놓고 간 輓詞는 絶唱 중의 絶唱이었습니다. 비로소 사람들은 그가 梅泉 黃玹 선생임을 눈치 챘습니다. 통분에 가득한 輓詞를 전하면서 분향하기 위해 전라도 광양에서 부산까지기 걸어서 왔습니다.
- 이항로께 배움 받은 꽃다운 나이로 애타는 백성 구하고자 상소를 올렸지. 선비거나 재상이거나 이제는 모두 끝이구려.
천년만년 길이길이 공론만 남았소. 속 썩은 귀양살이 이역이라 만 리 밖 빨간 신 신고 오신다기에 삼년을 손꼽으며 기다렸는데 소식조차 뜸했던 그 사이 바다건너 하늘 끝 큰 별 떨어졌다는 기별이니 초혼한다 하여 높은 곳 올라 바라 볼 생각마소.
푸르른 대마도 보기조차 싫지 않소.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를 뿐, 아 가련하다 어디에 님의 뼈를 묻으리오.
이 輓詞는 朝鮮時代의 輓詞 중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되는 명문이지만, 마지막 대목은 정말로 곱씹어 볼만 합니다.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를 뿐:故國有山虛影碧, 아 가련하다 어디에 님의 뼈를 묻으리오:可憐埋骨向何方’에 담겨진 절절함이 가슴을 저리게 하지를 않습니까. 고국산천 삼천리강토가 왜놈들의 땅이 되었는데 시신이 돌아온들 묻힐 곳이 있겠느냐는 절규는 읽는 사람들을 참담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1910년 8월에 日本帝國은 朝鮮을 강제 合倂합니다. 소식에 접한 梅泉 黃玹 선생은 더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결심하면서 絶命詩를 남기게 됩니다.
짐승들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이 나라가 망해 버렸네. 槿花世界己沈論
가을 등불아래 책 덮고 역사를 생각하니 秋燈掩券懷千古
지식인 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네. 難作人間識字人
梅泉 黃玹 선생은 스스로 自盡하기로 결심하고 아편 세 덩어리를 꺼내 놓고서도 좀처럼 결행하지를 못합니다. 그는 아우 黃瑗에게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기까지 합니다.
- 내가 아편을 입에 댔다 뗐다 주저하기를 세 차례나 했다. 선비로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구나.
梅泉 黃玹 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가족들에게 남긴 ‘遺子弟書’는 오늘을 사는 知識人들에게 준엄한 깨우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 내게는 꼭 죽어야 할 義理는 없다. 그러나 조선이 선비를 기른 지 5백 년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목숨을 끊는 이가 없다면 가슴 아픈 일이고도 남는다. 내가 위로는 하늘의 지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책 속의 말씀이 어긋나지 않았다. 이제 깊이 잠들려 하니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라.
저는 제 몰골이 답답하고 참담해 질 때면 梅泉 黃玹 선생의 ‘遺子弟書’를 다시 읽어보곤 합니다만, 읽을 때마다 <지식인 노릇하기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곤 합니다.
梅泉 선생은 쉰다섯을 일기로 통쾌한 마음으로 知識人의 길을 가셨지만, 저는 일흔이 넘도록 아무 한 일도 없이 이러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참담한 노릇이겠습니까.
지식인 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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