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恕
민주시민(citizen)의 바람직한 덕목(virtue)으로서 강조되고 있는 '관용'(toleration)은 처음부터 민주시민의 도덕원칙이 된 것은 아니었다. 관용은 종교전쟁 후 생명보전 및 공존을 위한 ‘잠정적 협약’(modus vivendi)의 형태로 발생했다.『유학과 정치학의 만남』「유교적 덕치와 자유주의적 법치의 도덕적 토대」김비환.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세미나 발표문. 2004. 11.
이후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관용의 유용성을 확인하는 가운데 관용은 자유주의의 관행적 도덕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의 관용론은 그것의 최초 모습인 협약적인 형태를 감안해 볼 때, 다원주의적 회의주의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절대적 믿음을 침식한다는 자체의 모순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전자의 시각은 관용이 협약상태로부터 도덕 원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도외시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용의 모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무관심의 문제는 도덕 원리화 된 관용적 미덕의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될 수 있다. 더욱이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혹은 문화다원주의(cultural pluralism)라고 불리어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관용의 한계는 그 긍정적 영향과 함께 많은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예컨대 칸트(I. Kant)적 자유주의자인 롤스(J. Rawls)와 하버마스(J. Habermas)의 대표적 주장인 ‘중첩 협약’(overlapping consensus)과 ‘의사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에 의한 ‘논쟁’(arguing)과 ‘타협’(bargaining)『정치학의 이해』서울대 정치학과교수 공저. 박영사. 2002. p.74
등은 어떠한 관용적 태도인가에 따라 각각의 실현성이 제약받는다. 또한 무관심적인 관용의 모순성은 결과주의적인 유용성(utility)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비민주적인 다수결의 폐해를 양산하며, 대의제를 옹호하는 슘페터(J. Schumpeter)류의 엘리트주의 담론『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치와 문화』김비환. 박영사. 2005. p.175
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자유주의의 관용론은 그 출발과 무관하게, 인간의 궁극적 선(human-telos)을 상대화된 정의주의적 질서(emotivist order)『덕의 상실』A.MacIntyre 저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 1997. 제3장
로 부각시키는 '사실(Fact)과 가치(Value)의 분리'라는 서구 근대성『삶의 정치사상』임효선. 한길사. 1996. p.249
에 환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유학의 恕 개념은 관계주의적 인간관에 따른 적극적인 가치와 규범을 도출한다. 仁을 행하는 방법(爲仁之方)으로써 제시된 能近取譬는 자신의 선한 본성으로 남을 헤아리는 絜矩之道와 상통한다.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논어』「옹야」
己所不欲 勿施於人『논어』「안연」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所 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대학』「전10장」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遠 亦勿施於人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중용』「13장」
‘내 마음(心)과 네 마음(心)이 같다(如)’라는 의미는 근본적으로 선한 본성의 기반에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恕는 ‘如’를 ‘가다’로 해석함으로써 타인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에서부터 타인으로 향하는 마음의 동적인 작용(推己及人)에 강조를 두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다.『東亞文化 제38집』「고대 유가에 나타난 인간의 특성과 이상사회」신정근. 2000. p.55~57
이상의 해석으로써 恕는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획일(同)이 아닌 현대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원적 통일성 즉 조화ㆍ화합(和)을 지향하고 있음(和而不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잠정적 협약의 성격을 벗어난, 恕 자체에 다원주의적 상황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다원주의의 도래에 따른 관용의 필요성 대두가 아니라 이미 다원주의적 사고의 토대가 恕의 덕목 안에 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관용의 모순성을 극복하는 ‘겸허’(generosity)와 ‘적극적인 다가감’(推)의 발로를 포함함으로써 상대에 관한 무관심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회의주의에 기인한 ‘멋대로 자유’를 방지할 수 있다.『유학과 정치학의 만남』「정치철학의 근본문제」이상익.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세미나 발표 문. 2004 11.
그럼으로써 시민들에 의한 자유와 권리의 행사는 사회적 책임감과 의무감에 의해 절제됨으로써 권위개념의 갈등적 의미로 해석 D. Easton: "Pol. is 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
H. D. Lasswell: "Pol.=Who gets what when how."
된 정치사회의 긴장을 완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유교문화연구 제1집』「유교민주주의에 있어서 유교, 자유주의 그리고 가치다원주의」김비환. 2000. p.111
더욱이 성리학의 ‘理一分殊’라는 형이상학적 맥락 형이상학적 근거의 도입과 관련하여 이러한 노력이 단일한 합리성과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포스트 모던의 시각과 대치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형이상, 형이하의 구분을 통한 형이하의 선택으로 연결된 칸트적 근대성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즉 동일과 다양이라는 이 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反포스트모던적인 시각인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배제하는 형이상 학은 억압적ㆍ절대적인 성격의 형이상학이지 형이하를 정당화하기 위한 혹은 바람직한 목표를 제 시하는 형이상학의 부정은 아니다.
과도 연결시킨다면 근대적 합리성이 외면한 ‘규범적 가치의 소외’라는 문제도 극복할 수 있으며, ‘理一’이라는 관점에서 소수의 권익도 보호하는 다수결의 폐해 역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관계적 實在觀을 바탕으로 한 恕 관념은 무관계적(irreconcilable) 實在인식에 기인한 권리와 자유가 절대화에 따른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ㆍ의무ㆍ유대도 거절하는 ‘나만의 울타리’(privacy) 신성화라는 자유주의의 폐해에도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현대의 위기 동양철학의 모색』「자유, 질곡과 해방의 경계에서」박원재. 예문서원. 1998. p.190
이러한 관용과 恕의 덕목은 각각의 상이점은 차치하더라도 다원적인 현대사회를 사는 시민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대두될 수 있다. 이러한 덕목을 바탕으로 한 덕스런 시민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선ㆍ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덕목이 어떻게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되는가의 문제 및 관용의 미덕을 증진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제도 확립의 문제는 여전히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관용ㆍ恕의 덕목이 한국이란 현실적 토양에 과연 얼마나 바람직스럽게 적용되고 실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앞으로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에 두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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