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특성과 현실의 규제 가능성
신 정 근
성균관대학교 유동학부 교수
1. 문제제기
근래 철학계에서 ‘보편의 배타성’ 또는 ‘동일성의 폭력’이라는 말이 자주 거론되었다. 이 말은 다시 포스트 모더니즘, 문명론, 상대주의, 오리엔탈리즘, 유럽 중심주의 등의 담론과 결합해서 본질주의, 보편주의의 아성을 크게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 결과 신조어나 새로운 언어 용례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하나의 철학으로서 Philosophy(철학)보다는 여러 갈래의 철학으로서 philosophies(철학들)가 있다.(‘철학’과 ‘철학들’의 한국어로는 유럽어의 대문자와 소문자, 대표 단수와 복수의 차이를 표현해내기는 어렵다.) 도(道)의 경우도 종래는 ‘도’(Dao)라고 표기했지만 ‘도들’(daos)로 표기되고 있다.
언어 사용자로서 우리는 이 글의 주제인 유학을 단 하나의 '유학'(Confucianism)으로 생각하느냐 여럿의 '유학들'(confucianisms)로 생각할까? 이에 대해 주장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는 대화의 형식을 통한 토론이 아니라 고백의 형식을 빈 선언문 낭독으로 진행될 수 있다. 발언자마다 ‘유학’이라는 말로 서로 다른 의미 체계를 전제하고 있다면, 그이가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말은 의미의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의미의 외곽으로 비껴나가게 될 것이다. 아니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극단적인 편애와 증오나 숭배와 무시만이 넘치고 생산적인 대화가 설 장이 없게 될 것이다.
논의의 가닥은 차츰 드러나겠지만 여기서는 내가 쓰는 ‘유학’의 어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일찍이 이광세는 ‘유학’을 세 가지로 구분한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 철학 사상으로서 유교, (2) 왕조 정치 체제를 뒷받침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 (3) 문화적 전통으로서의 유교이다. 이어서 그이는 (2)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므로 논의할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1)과 (3)을 현재의 의제, 즉 동아시아의 근대화와 연관시켜 논의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분류에 대한 동의 여부를 별도로 하더라도 ■이 (1)을 말하는데 ■이 (2)를 말한다면 두 사람은 대화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대화의 상황에 참여하려면 적어도 자기의 주장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영역에 소속하는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또 ‘유학’과 관련해서 주의해야 할 점이 한 가지가 더 있다. 전승의 문제이다. 개인이나 국가의 생명은 한계(끝)가 있다. 하지만 혹자는 ‘유학’에는 그 한계를 초월하여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왜곡 없이 전달되고 계승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유학들의 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것’은 어떻게 전승되는 것일까? 또 우리는 그렇게 전승된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약간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공자와 맹자의 관계에 대해서 “맹자가 공자의 적통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맹자에게 온전히 전수되었다”, “요■순■우■탕■문■무임금의 심법(心法)이 공자를 거쳐 맹자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라고들 한다. 이 때 우리는 적통, 전수, 심법의 계승 여부를 어떻게 확정할 수 있으며 도대체 누가 그 여부를 심사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설혹 ‘유학’의 초월성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그것에 대한 ‘심사’의 초월성은 불가능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같은 시대에도 무엇이 진정한 유학이고 가짜 유학인가와 관련해서 학문적 정치적 투쟁이 벌어졌다. ■논어■ 안에서 자유와 자하는 교육 방법이나 교육 목적과 관련해서 가벼운 설전을 보이고 있다.(■자장■) 순자는 당시의 학술을 개관하면서 맹자가 공자의 본지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성악■, ■비십이자■) 송제국 신법당과 구법당의 대립, 주희와 진량이 의리와 왕패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등도 있다.
이를 경우 그 둘을 모두 만족시키는 ‘유학’은 있을 수 없었다. 쌍방은 각각 이전이나 동시대의 타자를 끌어들여 상대가 유학이 아니라고 매도했다. 즉 유학 안에 반유학 또는 비유학이 생겨났고 이것은 다시 끊임없이 유학 밖의 비유학과 동일시되었다. 이런 배제를 나타내는 용어에는 양유음법(陽儒陰法)의 법가, 불교, 선(禪), 공리공담, 공학(空學), 소인, 금수, 오랑캐 등이 쓰여왔다. 이렇게 밀려난 비유학이 과연 추방령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을 밀어낸 ‘유학’을 반유학이라고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유학이 정치를 유학화시켜 유학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유학을 과도하게 정치화시켜 유학의 영역이 한없이 축소되었다. 극단적으로는 유학 속에 유학이 실종되는 사태를 낳았다.
압축해서 말하자면 유학들의 유학이란, 모두의 공인을 받는 정체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후대의 주류적인 특정 집단이 내린 ‘심사’(들)과 겹친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실제로 유학들의 유학은 없었고 유학들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들의 유학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하나의 유학이 자신의 현재를 이전 과거 총체와 연결시키려고 하는 창조(invention)의 작업이지 사실의 기록은 아니다. 문묘의 배향 인물이 바뀌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의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의 승자는 현재의 왕좌 타이틀만이 아니라 총체로서 과거(전통)를 전유하는 특권마저 손아귀에 쥐었다.
이처럼 창조(해석)를 사실로 전환시키는 힘은 이성이 존중되는 토론의 장이 아니라 욕망들이 솔직하게 드러나 지배권을 두고 대결하는 사각의 링이었다. 오늘날 그런 결투의 소리도 잦아들고 있다. 현재에 이르러 불필요한 소모전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으므로, 즉 문묘에 배향될 사람이 새로이 추가될 리가 없으므로 개인의 유학함으로 눈을 돌리자. 예를 들면 공자의 유학, 맹자의 유학, 순자의 유학, 동중서의 유학, 왕충의 유학, 주희의 유학, 왕수인의 유학, 고염무의 유학, 대진의 유학, 양수명의 유학, 강유위의 유학, 모종삼의 유학처럼 말이다. 공자와 똑같은 맹자는 없다. ■논어■와 ■맹자■의 글자를 비교해도 알 수 있다. 아니 공자와 똑같은 맹자는 필요가 없다.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으로 충분하지 두 사람일 이유가 어디에 도 없다.(유학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과 똑같은 유학의 반복은 구분되어야 한다.) 이처럼 ‘유학’을 집단이나 초월적 세계로 귀속시키기보다 개인과 연결지어 검토할 때 사상가가 시대를 어떻게 끌어안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는지를 제대로 식별할 수 있다. 이 길은 “모든 병폐의 원인도 유학이거나 모든 영광의 바탕도 유학이다. 총합은 0이다.”는 모 아니면 도(float or sink)의 상황을 벗어나 걸, 개, 윷, 뒤로 도 등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 될 수 있다.
이 글은 다음의 순서로 논의가 진행된다. 먼저 역사적으로 ‘유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분류하고 평가하는 방식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나는 ‘유학’의 이름으로 포괄될 수 있는 특성들을 추출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추출된 특성 중에서 나는 구세 의식, 성(誠)의 윤리, 신례(新禮)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오늘날 현실을 규제할 수 있는 가능성의 차원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2. 역사적 유학의 다양한 분류법
한국에서 일반인은 기독교의 로마 전파, 종교 탄압, 십자군 전쟁, 루터나 칼뱅의 종교 개혁 등 기독교의 역사를 세세하게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신자가 아니라 비신자도,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도 구교와 신교 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구분하고 성당과 교회를 나눌 줄 알고 크리스마스를 즐길 줄 안다. 반면 한국에서 일반인은 공자도 알고 맹자도 알고 이황도 알고 이이도 알지만 ‘고전’ 유학, ‘한당’ 유학, ‘신’유학, ‘조선’ 유학 등의 말에는 익숙하지 않다. 이에 대해 그들은 아마도 “유학이면 유학이지 뭘 그렇게 나누느냐?”는 항의식 반응을 보일 것이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보면 안에서 그렇게 엄청나게 따지고 나누었던 서울과 지역,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와 강원도의 차이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다. 심지어 코리아나 저팬(니혼, 니뽄)이나 차이나의 사람도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안에서 보이던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밖에서 별다를 게 없는 사소한 변양일 뿐이다. 이런 경험을 유학관에 적용해보면 한국에서 일반인은 안에서 유학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유학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전문가들이 리와 기가 어떻고, 심성이 어떻고 하면 일반인들은 그게 그건데 뭘 그렇게 핏대를 올리느냐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중에서 후원하는 학술대회를 가면 발표자와 논평자가 실제로 진지하게 차이(이종)를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해도 청중석의 사람들에게는 정도의 문제로 간주될 뿐이다.
그러면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실제로 유학에는 종교 개혁 이후의 개신교와 천주교의 분리처럼 종류의 차이가 없고 정도의 색채만 달랐을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것 같지 않다. 상대나 일파를 소인의 무리들, 간악하고 흉악한 인물, 이단이나 사문의 난적, 선의 탈을 쓴 유학, 겉으로는 유가이면서 속으로는 법가라는 소리가 컸던 것을 고려해보면 통합이 불가능한 분열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철학사 연구자들도 철학사 또는 유학사를 통사로 접근하면서 분기설처럼 나름대로 다른 유학을 규명하려고 노력해왔다. 몇몇 실례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대학에서 유학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하는 분류는 시대별 또는 왕조별 분류이다. 예를 들자면 선진 유학, 한당 유학, 송명 유학 등으로 말한다. 물론 이보다 더 쪼개서 한대 유학, 당대 유학, 송대 유학, 원대 유학, 명대 유학, 청대 유학 등등으로 유학을 분류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분류는 커리큘럼을 짜서 교육을 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식이지 학문적으로 그것의 타당성이 검토되지는 않고 있다.(교재용으로 쓰이는 유학사의 책에도 이런 분류가 별다른 정식화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울러 선진 유학은 유학사에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로 인해 원시 유학, 고전 유학 등의 별칭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이 이외에도 왕조별 분류에다 학문 방법론이나 학문적 특성을 첨가하는 분류법이 있다. 한대 훈고학, 당대 사장학, 송대 또는 송명대 심성학, 청대 고증학 등의 말이다. 훈고학은 한대의 지식인들이 주나라의 붕괴 이후에 사라지거나 파손된 고대 문헌을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텍스트의 분장■분절과 자구 풀이에 치중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장학은 당대의 관료 선발에서 고전 문헌에 대한 철학적 분석보다 문학적 창작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을 말한다. 심성학은 송명대의 학자들이 도덕의 근원을 현상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심성에 두었던 점을 말한다. 고증학은 청대의 연구자들이 실증적 방법론을 개척하여 심성론의 무근거성을 들추어냈던 것을 말한다.
청제국의 경우 분명 고증학이 커다란 흐름의 학문 방법론이자 학문적 특색이기는 하지만 ‘고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심성학을 정학(正學)으로 간주하면서 연구에 매진한 사람도 있었다. 한제국의 경우 훈고가 무시할 수 없는 특색이라고 하더라도 운명, 음양도 전시대를 통해 관철된 주제였다. 다른 시대나 왕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보면 고증학이 청제국의 특징일 수는 있지만 그것과 동일시될 수 없다. 또 그것이 청제국만의 특징일 수도 없다. 따라서 개인을 넘어선 학문적 공통점을 지시하기 위해서 ‘고증’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청제국 = 고증학의 분류는 재검토해봐야 할 듯하다.
풍우란(馮友蘭)은 중국 철학사를 자학(子學) 시대와 경학(經學) 시대로 나눈다. 한제국 초기 동중서는 무제에게 보고한 대책문에서 공자의 학술을 숭상하고 나머지 배척하여 사상의 통일을 이루고 태학과 같은 교육 기관을 설치하자고 주장한 적이 있다. 풍우란은 동중서의 활약을 기준으로 언론과 사상의 지극히 자유롭던 분위기가 사라진다고 본다. 그래서 공자로부터 회남왕 유안(劉安)까지를 자학 시대가 되고, 동중서로부터 강유위까지는 경학 시대로 나뉘게 된다. 경학 시대가 개막되자 사상가 또는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자학 시대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말을 하고 글을 썼으며 자학 시대의 언어를 사유의 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풍우란의 이런 분류는 학문과 정치 체제의 관련 양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철학의 전개 과정을 그리는데 몇 가지가 한계가 있다. 첫째, 이른 바 ‘경학 시대’ 안에 있던 학문적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사상의 통일’이 지시(담보)할 수 있는 현실적 상황을 어떻게 확정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학문과 체제의 관련 양상이 단선적으로 해석될 수 있느냐라는 점이다. 체제 밖에서도 얼마든지 안을 지향할 수도 있고, 체제 안에서도 얼마든지 밖이 상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자학과 경학의 분류는 학문 방법의 특성을 명시적으로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학문 내적 특성을 포괄할 수 없다.
모종삼(牟宗三)을 위시한 대만에서 활약하는 연구자들은 유학 삼분기설을 주장한다. 제1기는 공자와 맹자가 활약하던 시기이고, 제2기는 주희나 왕수인 등의 송명 리학자들이 심성론을 사유의 기본틀로 논의하던 시기이고, 제3기는 모종삼과 뚜웨이밍(杜維明) 등의 현대 신유학자들이 서양의 학문과 유학의 대결을 통해 유학의 현대적 가치를 발굴하려고 하는 시기이다. 이 삼분기설은 암흑과 재생 또는 단절과 부활의 모티브를 깔고 있다. 제1기가 제2기로 시간의 단절 없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맹자의 죽음으로 인해 한제국에서 당제국에 이르기까지 제1차 유학의 암흑기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제2기도 제3기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명제국의 유종주(劉宗周) 사망으로 청제국 기간 내내 제2차 유학의 암흑기가 있었다.
삼분기설은 유학들의 유학 또는 유학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내성외왕(內聖外王), 지행합일, 천인합일, 성선설, 양지(致良知) 등의 범주적 개념을 재생시키려고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삼분기설에도 몇몇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학문의 역사가 특정 인물 중심의 ‘도통’의 역사로 축소되고 있다. 따라서 도통에 빠진 사람은 학문의 세계에서도 자연히 추방된다. 둘째, 학문의 세계가 정통과 이단으로 양분되고 다시 학문이 정통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로써 학문이 자유로운 영혼들의 세계가 아니라 이념을 수호하는 결사 항전의 전장이 되어버렸다. 셋째, 역사적으로 한제국과 당제국 그리고 원제국과 청제국의 학문적 성과를 암흑으로 돌림으로써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색채를 강화시키고 있다.
이택후(李澤厚)도 유학 삼분기설의 한계를 비판한다. 삼분기설은 심성-도덕 이론으로 유학을 개괄했고, 순자의 학문을 말살하고 한제국의 유학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이는 이론 내적으로도 ‘내성개외왕’(內聖開外王)의 번잡성, ‘초월이내재’(超越而內在)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택후는 삼분기설의 편면성을 비판하고 사분기설을 내세운다. 제1기는 공자■맹자■순자가 활약한 시기이고, 제2기는 한제국 시대의 유학이고, 제3기는 송제국과 명제국 시대의 유학이고, 제4기는 중국 세계의 근대화와 관련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현재이다.
사분기설은 삼분기설이 송명리학 위주의 유학 해석을 비판하고 생략된 유학을 복권시키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다음의 전제가 깔려있다. 그이는 “시대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도전하는 것이 유학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24쪽)으로 생각하는데 지금 유학, 특히 송명 리학 위주의 현대신유학은 급속한 근대화 과제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그 결과 송명 리학의 틀에 갇힌 현대 신유학은 “새로운 시대를 구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지금 이후의 유학 연구자들도 현대 신유학의 학적 바탕 위에서 “진정한 철학의 새로운 것을 개척하기 어려울 것”(23쪽)으로 이택후는 진단한다.
사분기설은 공자 이후로 전개되었던 다양한 유학의 전부를 역사에 소환시키고 있다. 사분기설은 삼분기설에 대한 비판으로서 가치는 있지만 결국 분기설의 의의를 부정하고 있다. 그이는 사분기설을 주장함으로써 유학을 어떻게 나누어봐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연구자가 유학으로 무엇을 해야하는가 라는 점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이택후는 만약 누군가가 유학의 가치에 동의를 한다면 그 사람은 유학의 문제틀로 현대 사회와 대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유학은 이미 ‘있던 것’의 번안이 아니라 ‘아닌 것’과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없던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즉 사회와 현실이 바뀌고 바뀌어야 하는 만큼 유학도 자기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현대 사회의 과제나 문제점에 대한 연구만이 아니라 유학의 전 역사에 대한 성찰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이택후가 의식했던 못했던 간에, 그이의 주장은 분기설을 무용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부정하게 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학의 전개 과정을 조망하려면 분기설을 해체시키고 개인 사상가 또는 철학자 단위로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을 서술 항목의 단위로 설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차이를 드러내자는 것이다.
유학이 학문이라면 학문으로서의 의무를 질 수밖에 없다. 학문은 넋두리나 하소연과 다르므로 주장의 정당화 작업이 필수적이고 주장에 대한 이론적 사회적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왕조별 분류, ■분기설 등은 역사적 대상을 지시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대해 정당화를 요구하고 책임을 부과할 수 없다. 공자도 일찍이 말한 적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갈 길을 넓힐 수 있지 갈 길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을 넓힐 수 없다.” 이로써 개인이 집단 속에 웅거한 채 군중심리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공개된 광장에서 현실의 규제력을 책임 있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대별로 지역별로 개인을 넘어서 같은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개인이 먼저이고 개인들간의 공유는 그 다음이라는 것일 뿐이다.
3. 정제된 유학들의 좌표축: 이상과 현실의 접점을 향해서
과거의 유학이 마주했던 사회 현실과 유학의 현재가 마주하고 있는 사회 현실은 다르다. 일례를 들어보자. 과거의 유학은 신분 사회의 조건을 끌어안아야 했다. 유학자들은 귀천과 존비를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며 자연 질서로 설명했다.
정이천과 주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이는 하늘 신과 조상 신 그리고 불투명한(예측불허의) 의지와 결부된 기존 천관(天觀)을 뒤집고 모든 개별 존재와 연계되어 있으며 바람직한 질서를 투명하게 현시하고 있는 원칙[理]으로 해석하는 천관을 세웠다. 이 원칙은 사람이 걸어가야 길이며 국가(공동체)가 나아갈 길이며 사태가 풀려나가는 길이다.[所以然之故, 所當然之則] 이것은 사람의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의미 체계의 그물망으로 만물이 짜여있는 관계를 제시하고 의미 체계의 고속도로로 만물이 소통하는 틀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그이는 천(天) = 리(理) = 인(仁)의 등식을 고안했고 여기다 공(公)마저 추가했다. 그이가 이 공을 어느 한 쪽의 이익으로 치우치지 않고(impartiality) 모두에게 똑같이 옳은(fairness) 공정으로 본다면 천(天) = 리(理) = 인(仁) = 공(公)이라 하고서 신분을 자연 질서로 예찬할 수는 없다. 왕을 특별한 존재로서 예외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공의 세계에서 존비와 귀천을 정당화시키려면 엄청난 곤혹스러움을 겪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희의 곤혹스러움을 다시 느낄 필요가 없다. 또 그런 특성의 리라면 현재의 사회 현실에서 어떠한 규제력을 발휘할 수 없다.
오늘은 신분 사회가 아니라 평등 사회이며, 자연 의존적 저생산의 사회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가 모두 대량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이며, 시간과 공간의 지배에 매인 속박의 사회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이동과 비교가 가능한 이주의 사회이며, 자연의 위력에 속수무책이던 공포와 불안의 사회가 아니라 차츰 자연에 대한 통제력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있는 조절과 선택의 사회이다.
우리가 이러한 삶의 조건을 전체적이며 바람직하게 조직화시키기 위해서 과거의 유학에서 끌어낼 수 있는 자원은 무엇일까?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자동적으로 앞으로 있을 것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있을만한가의 시련을 통과해야만 살아남을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주제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첫째, 책임과 구세(救世) 의식이다. 둘째, 성(誠)의 윤리이다. 셋째, 례(禮)의 재조직화로서 신례(新禮) 문제이다.
3.1 구세 의식
과거의 유학자들은 단일하기보다는 복잡한 방식으로 세계를 조직화하여 질서를 부여하려고 했다. 이런 시도를 현대의 학문 분류로 따져보면 그 속에는 철학과 사상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박지원 등의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오늘날 인문 과학보다는 사회 과학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들은 현실을 규제하는 초월적 기준보다는 현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기술에 사고를 집중했다. 이들은 리기■심성 중심의 담론이 현실에서 질서 생성력을 상실했다면서 그것을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말[空理空談], 텅 빈 학문 또는 껍데기 학문[空學] 등의 말장난으로 비판했다. 원래 이 비판의 언어는 유학이 공동체의 구원보다는 개인의 깨달음에 치중하며 자연의 질서인 인륜을 저버리고 개인의 행운과 불행에 관심을 갖는 불교를 배척할 때 써먹었던 말이다. 그러면서 유학은 자신은 실학에 정위시켰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유학이 저주의 말을 뒤집어쓴 채 또 다른 유학의 도전을 받고 있다.
범위를 좁혀서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논어■ 속의 공자는 그 어떠한 이론의 제기를 받지 않고 모두 인정하는 단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까? 얼핏 생각하면 그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논어■의 공자를 바라보는(해석하는) 관점도 하나가 아니다.(물론 여기서 자기의 관점만이 정학(正學)이며 나머지는 사학(邪學)이라고 하는 관점은 배제한다. 그 관점의 소유자는 단 하나의 공자상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조적 주장일 뿐 학문적 주장은 아니다.) 이런 다양성이 빚어지는 이유는 ■논어■ 자체 안에 있다. ■논어■가 단일한 주제 의식 아래에서 통일적인 저자가 쓴 글이 아니라 내용이 통일이 독자에게 열려있는 개방형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이 어떤 구절을 중심으로 ■논어■의 세계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공자의 상이 달리 빚어질 수 있다.
예컨대 ■안연■ 1장의 “극기복례”를 주목해보자. 이 구절을 “사적 욕망을 극복하고 천리의 물적 토대, 즉 례로 돌아가자”는 식으로 해석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공자는 사적 욕망이 현실에서 무질서, 범죄, 타락을 낳은 원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서 그것을 철저하게 색출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아울러 그이는 수세에 처한 천리가 본래의 지도력을 회복할 수 있게끔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프로그램을 짜는 인물이 된다. 이로써 공자는 행동으로 나오기 이전에 마음 속에서 잘못을 기도하려는 원초적 욕망을 끈질기게 응시하면서 수양에 전념으로 도인의 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북송 시대에 형제 철학자 정호와 정이에서 의해서 그려졌고 주희가 완성해놓은 그림이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면 공자는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이고 법학자가 된다.
■논어■에는 여러 지층이 있다. ■미자■는 ■논어■에서 그리는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들의 출현으로 ■논어■의 세계에 명과 암, 흑과 백의 대조가 생겨나서 공자의 얼굴이 한층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 ■양화■를 보면 공산불요(公山弗擾)나 필힐(佛肹)이 반란을 일으키고서 공자를 초빙하자 그이는 가려고 했다. 한국의 경우라면 공자는 국가보안법에 따라 잠입, 탈출, 회합, 방조 등등의 이유로 준열한 법의 심판을 받을 만하다. 한 술 더 떠서 그이는 서쪽의 주를 대체하는 동쪽의 주나라[東周]를 건국하겠다는 포부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구절을 취합하면 공자는 손때가 묻은 죽간을 뒤적이며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는 연구자가 아니다. 그이는 직접적으로 반란의 기치를 내걸고 일반 대중이나 유민을 선동하지 않았을 뿐이지 국가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 체계를 건립하려고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그이는 일단 국가부터 새워놓고 보자는 대책 없는 철부지는 아니라 신중하게 강령을 만들고 정책의 우선 순위를 정립해놓았다. 이것은 바로 한제국의 동중서나 청말민국초의 강유위가 그려서 널리 유포시킨 그림이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면 공자는 정치학자이자 시민운동 활동가이고 혁명가이기도 하다.
이 이외에도 여러 가지 그림이 가능하다. ■논어■는 후대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일구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하게 채색되었다. 이 중 하나가 다른 것보다 월등히 나은 해석 체계는 없다. 이러한 다양한 그림 중에서 공통으로 들어가는 주제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세계의 운행에 책임을 지고 나아갈 길을 잃어버려 고통에 신음하는 현실 세계의 인민을 구원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구세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미자■에서 적대자들의 애정어린 충고에 공자는 자신이 날짐승과 들짐승과 같이 살 수 없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으며 실패와 성공 그 자체에 한 발짝 비켜서 나 있다고 고백한다. 바로 이 지점을 또 다른 은자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래도 뭔가를 하는 자”로 표현했다. 이 지층이 공자의 여러 얼굴을 부조하는 밑그림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 그림에 주목한다면 자신을 사적 이해의 영역에 가두지 않고 공적 해방의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역할을 찾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세 의식은 범중엄(范仲淹, 989-1052)에 의해서 가장 압축적이면서도 호소력있게 정리되었다. “외물로 인해 일희하지 않고 자신으로 인해 일비하지 않는다. ■ 세상 속으로 들어가도 걱정이 앞서고 세상과 거리를 두어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즐거워할 수 있는가? 그러면 이렇게 반드시 말하리라. 세상의 걱정거리를 누구보다도 먼저 걱정하고 세상살이의 즐거움을 제일 뒤에 즐거워할 것이라고.”
3.2 성(誠)의 윤리
성실은 한국 사람이 미덕으로 꼽는 덕목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좋고 믿을만하고 착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 성실도 근면과 마찬가지로 중독 현상이 있어서 무조건적으로만 찬양할 수 없는 계기도 있다. 성은 적어도 공자가 ■논어■에서 진지하게 다룬 주제는 아니다. 그것은 전국시대 맹자, 장자, 순자가 주목하기 시작했다가 ■예기■의 ■대학■과 ■중용■에 이르러 각광을 받았다. 그 뒤에 성은 철학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성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발언은 맹자가 먼저 제기했다. 그이는 성이 자연의 길인 반면 사람에게 성은 자연의 길을 모방하고 재연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은 일차적으로 중단 없는 지속의 계기를 가리킨다. 이 계기는 외적 동인 없이 그 자체의 활력으로 진행되는 자연 세계의 무한한 생성 능력을 가리킨다. 이 계기가 사람에게 무제약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이로써 사람은 자신을 이어졌다 끊어졌다하는 단속의 과정에서 빼내서 쭉 이어지는 지속의 과정을 진입시키도록 방해 요인을 경계하고 진입의 의지를 활성화시켜한다.
그러나 맹자가 이미 포착했듯이 성은 지속의 계기만으로 완전하지 않다. 또 하나의 요소는 명선(明善)의 계기이다. 지속이 광포한 무한 질주가 아니라 나와 세계의 의미 연관을 정초하는 방향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인지 아닌지 빛을 비추는 계기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은 성과 덕의 구별되는 언어 용법을 낳았다. 덕은 기술과 힘의 계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방향을 선으로만 정향시킬 수 없다. 이에 덕은 미덕(美德)이라는 언어 조합도 허용하지만 동시에 악덕(惡德)의 언어 조합도 허용할 수밖에 없다. 반면 성은 지속과 명선의 종합으로 인해서 악과 언어 조합의 가능성을 배제시켰다. 나아가 이 성이 가짜와 뚜렷하게 나뉘는 참, 진짜 세계를 대변하면서 언어 조합의 가능성을 최소화시켜버렸다. 우리는 성에 주목을 한다면 선에 입각해서 입안한 계획과 포부가 지속되게 할 수 있고, 판단과 행위나 다짐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될 수 있는 근원을 찾게 된다.
한국 사람에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정답의 세계와 현실의 행동 사이의 불일치이다. 초등학교의 도덕 시험은 횡단보도의 신호동이 파란 불일 때 길을 건넌다는 곳에 정답을 표시하지만 실제로는 무단횡단을 한다. 시험에서는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전 국토가 쓰레기장이다. 산도 강도 들도 바다도 그리고 강의실도 거리도 온통 쓰레기장이 된다. 교과서의 표준적 세계가 현실로 이행하게 되면 너무나도 무기력하여 사람의 행위를 제지하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행태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의 제시보다는 포괄적으로 착한 사람을 지향하는 교육관도 문제이다. 우리가 모든 점에서 균질적이며 완성된 사람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즉 현실과 기준의 차이가 현격하므로 사람이 몇 차례 시도해보다 경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편적 감시자 의식의 부재이다. 시선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시선을 느끼면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는 쉽게 잊혀지지 않고 나를 공포 속에 가둠으로써(내면화시킴으로써) 그것의 불시적인 출현을 예방할 수 있다.
반면 한국 사람은 사회적(공동체적) 시선을 강력하게 의식하고 그것에 의해 자신을 규율한다. 그 사회적 감시자가 국가 보안법과 같은 법률에 의해 국가적 감시자의 꼴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감시자가 부재한 공간으로 들어가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며 그런 공간을 창출한다. 이 공간에서는 자유를 누린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도 자유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의 출현은 나의 신체와 사지를 얼어붙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측면에서 신세대의 행동은 구세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일례를 들자면 애정 표현이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에 따라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들은 구세대가 겪는 사회적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이 자유가 구세대에게는 버릇이 없고 철이 덜 들은 짓으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갑작스레 초월적 감시자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렇지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괴리는 아름답지도 옳지도 않으므로 시정이 필요하다. 이 시정을 위해서 성의 윤리를 되돌아볼 수 필요가 있다. 적어도 성에는 두 영역의 불일치를 주시하면서도 추적하는 성의(誠意)와 신독(愼獨)의 내적 행위자가 있다. 이 행위자는 지속과 명선의 힘으로 불일치와 단속의 괴리를 가깝게 만들 수 있다.
3.3 신례(新禮)
례는 어원상으로 사람과 하늘의 신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를 매개하는 제사 의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두 세계가 관계를 맺고 있고 맺은 관계가 우호와 협력이라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위해서 거행되는 행사와 례는 떨어질 수 없다. 나중에 례는 규제의 범위를 사람과 초자연적 존재 사이만이 아니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조상 신), 산 사람과 산 사람, 산 사람과 사물 등으로까지 확대해 나갔다. 이로써 례는 사람이 관계를 맺는 모든 영역의 질서를 부여하는 만능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여기서는 례가 위계적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측면을 논의하지 않는다.) 이 질서를 지키면 고상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식하면서도 저속하며 야만적인 사람이 된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예에 따르는 길이 인간다움에 이르는 통로가 된다. 전통시대 부모의 상례에서 삼년상의 준수는 자식다움이면서 사람다움을 구성하는 핵심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될 것이다.
■예기■ ■악기■를 보면 재미있는 실례가 있다. 우리는 기분을 좋게 하려고 술을 마신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사람이 술을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이 술을 먹는다는 말처럼 술이 사고나 범죄를 낳기도 한다. 술 안 먹으면 멀쩡한 사람도 술만 먹었다 하면 고약한 버릇을 내는 사람이 있다. ■악기■의 기록자는 술로 인한 불행과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 만든 주례(酒禮), 즉 술 마시는 례를 소개하고 있다. 술을 한 잔을 올리고 백 배를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루 내내 술을 마셔도 취하게 되지 않아 술로 인해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논어■를 보면 공자도 술로 인한 어려움을 고민한 흔적이 있다. 그이는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몇 잔 또는 몇 병까지 마신다는 한도를 정해놓지 일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했다.(이러한 경계가 ■악기■에서 소개한 주례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악기■대로 술을 마신다면 오늘날도 술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음주를 위해 현대인에게 ■악기■대로 하라고 한다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이러한 주례는 너무나 이상적이지만 현실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현실에 대한 규제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것을 강요하거나 선양한다면 주례만이 아니라 례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이러한 인상의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례하면 굳은 얼굴, 뻣뻣한 자세와 같은 경직된 분위기를 연상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례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을, 문명화가 아니라 비인간화를, 선의의 규범이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늘날 과거에 례가 수행하던 기능, 특히 사회 질서와 관련되는 부분을 법이 담당하고 있다. 물론 과거 례의 핵심 자리에 있던 상례와 장례는 지금 간소화에 간소화의 길을 걸어서 그 자체로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사회가 친족끼리 서열과 관계에 의해 질서가 부여되던 사회가 아니므로 친족과 관련된 례도 존재 기반을 상실했다. 법과 상식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면서 례가 제자리를 구축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있다. 낯선 사람들끼리 공공의 장소에서 만나서 교제하고 살아가다 보면 서로 다른 생활 습관이나 개인적인 특성으로 부닥치는 일이 많다. 또 핸드폰처럼 공적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경우, 즉 명백한 피해를 주는 행위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사소할 수는 있지만 오해와 갈등을 일으키고 피해를 주는 것으로 타자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이 필수가 대수롭지 않는 영역에 처박혀있을 것이 아니라 중요한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의 공동의 과제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과거례 관련 문헌에서 나오는 사상례(士相禮)가 인상례(人相禮)의 공공예절로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기』 첫 편인 ■곡례■의 첫 마디가 “이러저러한 례의 규정들이 모두 상호 존중으로 향하고 있다”(曲禮曰毋不敬)는 것이다. 이제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누구로부터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례가 아니라 서로 같은 지평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맥락에서 례를 재조정해야겠다.
4. 맺는 말
당위와 자연, 이념(이상)과 현실은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려고 할 때 복잡한 사고의 길을 단순화시켜주는 열쇠말이다.
과거의 유학자들은 이상을 제시하는 데에 골몰했지 자연과 현실의 자체 역량을 직시하지 않았고 그것의 저항력을 애써 낮게 평가를 했다. “왕이 올바른 마음을 먹기만 하면■”, “선인이 중요한 자리에서 역할을 하면■”, “성인의 가르침이 제대로 가르쳐지기만 하면■”, “제대로 알기만 하면■”, “사람이 성인이 되고자 마음을 먹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현실로 모두 이상의 도래를 환영할 것으로 보았다. 현실은 늘 이상을 괴롭혔고 유학자들은 의도와 달리 전개되는 현실에 당혹감을 느꼈다. 전설에 나오는 치우나 소설에 나오는 걸리버에게는 100kg의 물건 들기는 쉬운 장난이겠지만 20kg이 되는 사람더러 100kg을 들라고 하면서 왜 그것을 못 드느냐고 한다면 묻는다면 적절한 책임 추궁이 아닌 것이다.
또 그들은 욕망의 종류를 갈라서 특정한 것의 수로만을 열어주고 나머지는 철저히 막혀서 고사시키려고 했다. 간명하게 정리하면 그들에게 욕망은 범죄의 딴 이름이지만 지금 권리이다. 물론 지금도 모든 욕망이 법으로 보장받는 권리로 대접을 받지는 못하다. 문화권보다 다르겠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권리로 인정받지 못할 욕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욕망은 도덕과 윤리의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사적 영역에 둥지를 틀고 있다. 예를 들자면 고대에는 음악의 감상도 심성의 도야와 연관지어 국가가 도덕의 이름으로 제재하려했지만 오늘날 거의 전적으로 개인의 취미로 맡겨져 있다.(전두환 정부도 ■시경■ 속의 이름을 빌어 ‘국풍(國風)81’을 개최하여 이런 음악을 좋아하고 불러야 한다고 제시하고자 했다.)
현실과 욕망이 다시 이상과 당위가 가까워지려면, 즉 유학이 현실에 대한 규제력을 가지려면 현실 탓만 하고 유학 탓을 하지 않는 자세는 합리적이지 않다. 유학 중에서 현대 사회와 부합되지 않는 가치는 재평가의 대상으로 분류를 해야 한다. 유학들의 유학은 없다. 다만 우리가 어떤 유학의 이름으로 재조직해서 현실과 욕망을 향해 어떻게 접점을 마련할 것인지 검토를 해야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 접범의 일환으로 구세 의식, 성의 윤리, 신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학의 본질과 사회적 적용
- 유학의 특성과 현실의 규제 가능성 -
김 기 현
전남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유학의 특성과 현실의 규제 가능성」에 대한 논평
金 起 賢
전남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평소에 평자(김기현)는 저자(신정근)를 남다른 주제의식(主題意識)을 갖고서 꾸준히 논제(論題) 탐구의 성과를 산출해내고 있는 학자이자 장차 한국 학계에 귀중한 기여를 할 소장학자의 한 분으로 생각해 오고 있었습니다. 평자가 볼 때는 오늘의 논문 역시 저자의 그러한 주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발표 논문에 대한 ‘논평’의 개념과 의의에 관하여 한 가지 견해만 있는 것은 아닐테지만, 평자는 논평자의 소임을 ‘논문 저자의 논증 작업에 보완(補完)이 되거나 도움이 될 내용, 검토해 볼 점, 그 논문이 갖는 의의 등을 거론해 주는 것’이라 여기고 있는 바, 오늘 저자의 논문에 대해서도 이것을 기준으로 몇 가지를 언급함으로써 논평자의 책임을 면하고자 합니다.
1.
전체적으로 볼 때 저자는 앞부분에서 유학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문제에 관한 몇 가지 개념 정리를 해주고 있고, 이 개념 정리 위에서 저자 자신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저자는 유학의 전개 역사에 등장했던 주요 유학들의 ‘원형’ 내지는 ‘그 모든 유학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유학(Confucianism)을 “유학들의 유학”으로 명명(命名)하고서, “유학들의 유학은 없다”(2쪽, 11쪽)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이어, “역사적으로 ‘유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분류하고 평가하는 방식들”(3쪽)을 분석한 위에서, “‘유학’의 이름으로 포괄될 수 있는 특성들”(3쪽)로서 ‘구세 의식’, ‘誠의 윤리’, ‘신례(新禮)’의 세 가지를 현대사회에서도 일정한 규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현대유학의 가능성 요소들로 검토ㆍ제안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평자 역시 ‘유학들의 유학’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와 관련하여 보충 설명을 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1) 첫째로, 2쪽에 “유학들의 유학이 있다고 하는 것은■”이라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혹시 ‘유학들의 유학’이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되는데, 만일 저자가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들을 전제로 하고 이 글을 썼다면 그런 주장을 한, 또는 하고 있는, 몇 사람의 예를 들어 줄 수 있을까 듣고 싶습니다.
(1-2) 둘째로, ‘유학들의 유학’은 없지만, 그 ‘유학들’(예컨대, 맹자학, 순자학, 漢代유학, 성리학, 양명학, 다산학, 고증학 등등)에 ‘공통된’, 또는 ‘필수적인’ 요소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만일 이것도 없다고 한다면, 유학과 타 학문과의 변별(辨別)이 어려워질 수 있는 곤란함이 발생할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예컨대, ‘유학들’에 공통된, 또는 필수적인 것으로 ‘공자의 사상을 긍정함’, ‘仁을 추구함’■ 등을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철학[哲學思想]’의 면에서 ‘유학들의 유학’은 없지만, ‘敎’의 면에서는 ‘유학들의 공통분모’가 있어야 그 ‘유학들’이 ‘유학’의 한 지류(支流) 또는 한 단계임이 정당화되고, 타 학문과의 변별 기준도 분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저자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2.
중국대륙의 학자 이택후 선생의 유학론(儒學論)에 관한 저자의 서술 내용에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한국의 독자가 이택후 선생의 유학론을 읽을 때 그의 유학론이 갖는 특색으로서 알아두어야 할 점을 거론하고 싶습니다. 평자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택후 선생은 철저한 유물론(唯物論) 사상가인 것으로 평자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학의 연구는 ‘누구누구는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자이든 극단적인 자유주의자이든 무정부주의자이든 공산주의사상가이든 누구나 유학을 연구할 수 있고 오히려 다양한 관점의 연구를 평자는 바라고 있습니다만, 연구의 출발 이전에 이미 ‘형이상학은 긍정할 수 없다’는 대전제(大前提)를 세워놓고서 유학을 논하는 연구자의 경우라면 그의 유학론을 인용하거나 거론할 때, 또는 읽을 때 그러한 면을 미리 알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령 연구 이전에 이미 신(God)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저한 無神論者가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관하여 연구하여 기독교론을 펼칠 때, 그가 아무리 진지하게 접근하고 객관적인 것을 추구하는 학문정신을 충분히 발휘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기독교론ㆍ이슬람교론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내용이 주류가 될 것이라는 것은 미리 예측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겠습니다.
현대신유가(現代新儒家)의 유학[현대신유학]은 송명이학(宋明理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송명이학은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입니다. 평자가 알기로는, 이택후 선생은 칸트철학이 되었든 송명이학이 되었든 적어도 형이상학적인 부분은 전혀 긍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연구 자세, 또는 연구 방침이 그의 학문함의 대전제라고 한다면, 현대신유학을 “현대송명이학”이라고도 일컫는 이택후 선생의 현대신유가론을 한국의 우리는 ‘그러한 연구 자세’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하여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는 사실상 유교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끝냈어야 할(쳐다볼 일도 없을 봉건 잔재를) 이택후 선생이 ‘왜 그토록 시간이 갈수록 유교를 정면으로 논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비판ㆍ부정하는가’를 되새김해 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흔히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말합니다만, 이택후 선생에게 유교는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가 有限한 그의 人生에서 왜 그렇게 ‘가치없는’ 대상에 정력을 소모하는지를 한 번 곱새겨볼 가치가 있다고 평자는 생각합니다.
저자가 이택후 선생의 유학론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현대신유가에 관한 많고 많은 시각들 중에 특별히 이택후 선생의 유학론을 거론할 때 한국의 우리가 유의하여 읽고 들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되어 언급해보았습니다.
3.
현대신유가(現代新儒家)에 관한 저자의 서술 관점은 평자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른 부분이 있어 참고로 거론해 두고자 합니다. 현대신유가의 주요 학자들이 구체적인 연구작업을 본격화한 시기는 대체로 1949년에 중국이 분단된 이후 주로 대만과 홍콩을 거점으로 연구를 진행한 이래의 약 20-30년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평자는 이 기간에 이들이 정부 차원의 직ㆍ간접적인 지원을 받거나 적어도 재력가의 재정적 후원 정도는 받으면서 연구를 하였으리라 막연히 생각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원은 그만두고 더러는 오히려 핍박을 받는 일까지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유명세 등등의 상황 변화로 달라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그야말로 순수하게 중국의 문화와 철학에 대한 열정과 책임의식에서 각자 주머니 털어 그룹스터디의 비용을 마련하고 원고비로 비용을 마련하면서 연구하고 토론하여 왔던 것으로 평자는 알고 있습니다. 현대신유가는 “진정한 철학의 새로운 것을 개척”(5쪽: 이택후의 말)할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러한 새로운 철학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현대신유가는 그런 의미에서의 새로운 유학을 추구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학으로 한정하여 말하자면, 그들은 유학을 하나의 ‘생명’으로 간주하고서 모던(Modern, 근대, 현대)의 풍랑(風浪)에 휩쓸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유학을 모던의 여건 하에서도 충분히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부활(復活)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현대신유가는 ‘유학의 현대화’의 방향을 이런 쪽으로 설정하고서 정진(精進)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기설(期說)’ 등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유학의 생명력이 관건이었다는 뜻). 말 그대로 온 몸을 던져[投身] 유학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려 한 그 점을 우선 직시(直視)하고서, 그 다음으로 이러저러한 논의를 하여야 온당하다고 평자는 생각합니다.
私的인 말이 될지 모르겠고 過한 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현대신유가의 학문 과정에 비한다면 이택후 선생은 편하게 학문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유학이 모던(Modern)의 격랑(激浪)에 生과 死를 오가는 위기 때에는 관심도 두지 않다가, 현대신유학이 성공하여 지위를 잡으니까(다르게 말하면, 더 이상 그 위상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니까) 이것저것 다 부정하고 딴지걸면서 또 한편으로는 현대신유학의 ‘3기설’에 하나 덧붙여 ‘4기설’을 자신의 학설로 내놓는 것 등은, 비록 순수하게 학술적으로는 존중해주어야 하지만, 편하게 학문한 사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비록 중국 내부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아왔다고 하나, 그것은 사회주의 체제에서(특히 좌파와 우파의 갈등 대립 등) 뭔가 나름의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면 겪을 수밖에 없는 중국대륙 내부의 상황도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적절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평자는 저자가 5쪽 상단에서 서술한 ‘첫째’, ‘둘째’, ‘셋째’ 사항에 관하여 (이것은 이택후 선생의 관점이라기 보다는 저자의 관점이라고 판단되는데) 이후 전거(典據)를 제시하여 주었으면 합니다. 평자 개인적으로는 현대신유가의 장점(한국의 유학계 또는 유학 연구자들이 본받았으면 하는 점)으로 타 철학, 타 종교와의 공존(共存)의 자세를 견지(堅持)하는 점을 들어 왔습니다.(예를 들면, 웅십력ㆍ방동미 선생의 불교 연구, 방동미ㆍ모종삼ㆍ당군의 선생의 서양철학 연구, 모좀삼 선생의 도가 연구 등등) 이것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예컨대 ‘둘째’ 항목에서의 “학문의 세계가 정통과 이단으로 양분되고”, “학문이 자유로운 영혼들의 세계가 아니라 이념을 수호하는 결사 항전의 전장으로” 등의 서술은 확인(確認)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셋째’ 항목에서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색채”라는 서술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민족주의’라는 말이 ‘국수주의’(자기 민족만이 우월하다는 식)와 동의어라면 평자가 볼 때 이것은 사실과 너무 거리가 있는 진술로 판단되고, 국수주의가 아닌 일반의 ‘민족주의’로 쓰였다면,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혹시 저자는, ‘유학들의 유학’과 마찬가지로, ‘철학들의 철학’의 존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현대신유가가 민족주의 색채를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바꿔 말해서, (3-1) 민족주의 색채가 전혀 없는 ‘현대유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인지, 아니면 어느 현대유학이 아무리 보편성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 출발에서는 어느 특정 민족의 유학으로부터(또는 특정 민족에 의해) 출발할 수 없다는 입장인지 등에 관하여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4.
저자의 핵심적 관심은 이택후 선생의 유학론이나 현대신유가가 아니라, 한국인 학자에 의한 ‘현대유학’의 정립 시도라고 평자는 봅니다. 그러므로, 위의 사항들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자가 저자의 대안을 모색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위의 논의들이 일정한 의미를 갖고 있기에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저자의 입장을 좀더 듣고자 거론해 보았습니다.
끝으로, 저자의 이 논문과 같은 시도가 갖는 ‘의의’에 관하여 한 가지 저자의 입장을 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4-1) 가령 저자나, 아니면 다른 연구자에 의해, “유학 중에서 현대사회와 부합[되는 내용들을] 재조직해서”(11쪽. [ ] 안은 평자가 삽입) 현실과 욕망을 향해 접점을 찾은 하나의 유학이 제시되었을 때, 그때는 현대의 유학계가 반드시 그 대안을 지지하고 추종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평자의 생각은 자제하려고 합니다만, 이해를 위하여 말해두면, 평자는 이것을 ‘역사의 선택’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요컨대 역대의 ‘유학들’ 가운데서 (이론상으로) 꼭 가장 나은 유학이 그 시대의 대표적 유학으로 추종되는 것은 아니다고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주도하는 사람들(또는 세력)이 그 유학을 채택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그 유학은 그 시대의 대표 유학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주자학은 500년 이상 동아시아 정신문화를 대표하는 철학사상의 지위를 누려왔지만, 잘 알다시피 정작 당사자인 주자는 말년에 그의 학문이 사이비(‘僞學’)로 몰렸고, 주자는 사실상 요즘 용어로 말하면 가택연금 상태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 그의 학문이 약 100여 년 후 관학(官學)으로 채택되었는가 하면, 송대 당시에는 큰 학파였던 호상학파의 유학[湖湘學]이나, 여동래의 유학은 역사의 무대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주자의 유학이 반드시 호상학이나 여동래의 유학보다 학술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라 말하기는 어렵다고 평자는 생각해 왔습니다.
요컨대, 연구자는, 주자나 왕양명 등등이 그러하였듯이, 자신의 입장에서 정립한 대안을 완성해가고 제시할 뿐이지, ‘이후의 역사에서 어느 것이 선택될지는 사실은 연구자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점에 관하여, 저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였습니다.
평자는 저자의 시도를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으로 보고 있고, 논의 내용에 관해서도 전반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지금까지의 학계에서는 아직 낯선 면이 있어 몇 가지 지엽적인 것에 관한 보충설명을 요청하게 되었음에 관하여 양해 바라겠습니다. 한국인 학자에 의한 주체적 연구의 한 사례를 직접 접한 행운에 감사하면서, 또한 저자의 시도가 하루빨리 유학 연구계의 지평에서 하나의 거봉으로 우뚝 서기를 바라면서 이상으로 논평을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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